2024. 10. 30. 08:17ㆍ카테고리 없음
61. 체코
동독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지도상에 나오는 고속도로라고 생각한 도로를 타고 갔는데 사실은 그게 지방 국도 같았다. 사실 동독의 고속도로는 희한했다. 세상에 고속도로가 우리나라 충청도 청양 복판에 박은 것같은 돌조각을 붙인 고속도로를 보았는가? 아! 이 도로를 운전하니 옛 로마나 중세기사의 말발굽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갑옷을 입고 창을 들고 말을 달리면 다그닥 다그닥 하는 큰 말발굽 울리는 소리, 그래, 운전을 하면서 드레스덴에서 체코로 향하는 소위 고속도로라고 이름 붙여진 도로에서 이런 말발굽 소리를 내며 달렸다. 그래도 앞 차가 빨리 가니 나도 최하 시속 100키로는 달려야 하는 이 안타까운 심정, 차 고장은 아니래도 정비소에 갔다온 마당에 차바퀴 소리가 너무 크게 나니 이거 펑크 난거 아녀? 하는 당혹감에 자꾸 속도를 줄여서 옆에다 대고 사펴보고 싶은데 그 날따라 무슨 차가 그리 많은지 속도 줄이면 욕먹기 딱 좋은 날이었다. 멀리서 체코 국경이 보였다. 그런데 체코는 여느 유럽나라와 달랐다. 국경수비대인지 세관원인지 전부 옷을 북한 인민군 혹은 소련 비밀 경찰처럼 보이는 청녹색으로 입고 빨간 줄이 쳐진 완장과 모자를 쓰고 창이 작고 높아 솟은 모자를 쓴 채 여권을 요구하였다. 여권을 보여주고 그대로 올라가니 체코의 국도가 이어졌다. 여기서부터 프라하까지는 아직 100 마일이나 되었지만, 고속도로만 타면 그리 문제될 것은 아니다. 고속도로를 찾기 위하여 국도를 위로 위로 타고 올라갔다. 그런데 그 국경입구의 국도에서 정말 눈물어린 것을 보고 말았다.(이글은 2000년도 시점임을 참고)
국경수비대의 사무소를 지나 우리는 상쾌한 시골을 지나고 있었다. 나무가 우거지고 강이 흐르고 마을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맑은 공기를 쐬며.. 커브를 돌자 저 멀리서 기가 막한 금발의 미녀가 핸드백을 옆에 끼고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화장을 진하게 하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간절한 눈으로 우리차를 바라보며 손을 흔즐었는데 차가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꽉 찬 것을 보고 그냥 손만 흔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녀가 아주 진한 화장과 아주 짧은 스커트 그리고 가슴이 깊이 패인 셔츠를 입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2Km 정도 가니 비슷한 미녀가 손을 흔들어 이번엔 차를 세웠다. 우리는 여행객이다. 태워줄 자리가 없다고 했더니 그냥 가시라는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든다. 나는 여기서 이 젊은 아가씨들이 혼자 여행하는 남자에게 몸을 팔기 위해 이 한적한 시골길에서 손을 흔드는 여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 번째는 그냥 지나쳤다. 그러면서 마음이 찡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의 60년대 70년대에 군대에서 불렸던 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잖냐 하는 노래가 불현 듯 떠올랐다. 저 화장을 진하게 하고 온몸을 노출하여 가며 손님하나 붙들려고 몸부림치는 아이들도 집의 식구들이 있겠지? 부모며, 동생이며, 동생들 학비며 먹을 빵과 고기도 사야할 돈, 돈이 필요해요. 라고 외침을 들은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졌다. 아 나는 몸은 지치고 피곤한 운전하는 여행객이지만 저 아이들 보담 우린 몇 백배 행복하지 않은 가? 감사해야겠다. 부모에게, 나라에게, 신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4-50마일 올라가니 고속도로가 나타나고 우린, 비교적 편안하게 프라하로 들어왔다. 프라하는 시내 초입에서도 몰랐고 중심지에 와서도 몰랐는데 그 도시의 고색창연함에 머리를 숙여야 했다.
여기는 일반 유럽 선진국에 비하여 물가가 3분지 1정도 싸서 우리는 여행 10일이 넘어서야 처음으로 숙소를 호텔도 아닌 호스텔이라는 곳으로 잡았다. 그것도 중심가에서 제일 싼 곳인데, 호텔보다는 좀 낮은 등급인데, 시설은 괜찮았다. 방1개에 침대가 4개가 있었지만 네 식구가 자기에는 너무 컸다. 엘리베이터도 중세시대의 것처럼 문을 현관문처럼 열고 닫는 아주 구식으로 갖추어진 호텔인데 괜찮았다. 프로이센 제국시대를 풍미했던 체코는 중심지에서 가만히 보니 건축물의 규모나 양식이 엄청나게 크고 거대하고 육중하나 지금 2000년대를 살아가는 모습은 때가 끼고 다듬지 못한, 그리고 이제 자본주의를 보고 쫒아오며 그에 맛을 붙이려는 철부지 어린 강아지 같았다. 그런데 거리를 지나며 보는 그 고전적인 건물들은 영 잊혀지지 않는다. 체코의 옛 영화를 보여주는데, 언제나 그 영화를 되찾을련고. 여긴 런던의 중심가나 독일의 중심가를 넘어서는 그런 호화찬란한 근세 역사의 흔적을 건축으로 보여주나 지금은 세련되지 못한 자본주의의 꽁무니를 쫒아오는 추종자 형국이다. 호텔을 잡아놓고 밤새도록 시내를 배회하다 넓직한 방에서 정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도 시내를 돌아다녔다. 여긴 유대인의 교회인 시나고구가 많았다.
왜 많은지는 모른다. 많기에 보고 있자니, 유대인 관광객이 시나고구 앞에서 사진을 찍고 비디오를 촬영하고 난리다. 관광객이거나 또는 현지의 유대인은 바로 표가 난다. 검정챙의 모자에다 검은 도복을 걸치고 다닌다. 아니면 머리 위에 빵떡같은 빵 모자를 쓰고 다닌다. 가만히 보니 그들의 챙이 넓은 갓 같은 모자, 검정 도포같은 의상은 마치 한국의 전설의 고향에서 보는 죽음의 사자 같은 것인가 아니면 스님이 입는 회색 도포 같은가 하여튼 예수를 못 박게 만든 유대인의 사죄하는 의식으로 입는 옷, 혹은 아담이브가 저지른 원죄의 회개를 지향하는 옷과 복장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스텔에서 하루자고 아침은 호텔이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서서 차를 가지고 중앙역에 주차 한 후 못 다한 시내 볼거리 일정을 채우는데, 우리는 다리를 지나고 교회를 지나 마침내 점심시간이 다 되어 국회의사당 앞에서 그 유명하다는 프라하에 있는 평양냉면집을 가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는데 좀체로 냉면집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쳐서 아이들과 국회 의사당앞에서 쉬고 아내가 혼자 찾아나섰다. 그런데 부인은 거의 한 시간 가량을 기다린 끝에 나타나서 냉면집이 없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터벅터벅 걸어 중앙역 앞에 세운 차로 걸어오는데 어느 차 한 대가 서는데 한국 사람이 타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국인이세요 하고 아내가 물으니 그렇다는데 북한 억양이 심하다. 우리는 지금 프라하 강변의 배에서 파는 평양냉면집을 찾는대 못 찾겠다 혹시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 차의 탄 아줌마 왈, 우리가 그 냉면집을 운영하는데 그 식당을 운영하는 배가 안전에 문제가 있어 수리를 하라고 체코시에서 명령이 떨어져 지금 수리를 하느라고 장사를 못해요 라고 한다. 그래서 어디 출신이냐고 물었더니 대뜸 평양에서 왔다고 한다. 이 말에 머리가 쭈삣 서면서 이야기 그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에서 여기 와있으면 보나마나 북한 정보원일 것이고 내가 이 사람을 더 이상 접촉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래서 황급히 작별을 하고 헤어졌다. 아내는 이런 나를 이상하게 봤지만 나는 나대로 그렇게 해야 했다. 아직 우리는 냉전이잖아. 그런데 어쨎든 체코에서 북한인 일망정 장사를 한다는 그 사람이 반가운 건 사실이었다. 체코는 물가가 싸고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낙후된 나라라 그런지 우리나라 학생들은 배낭 뒤에다 태극기를 당당히 꽂고 다니면서 한국 사람임을 과시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아 강력했던 한 나라의 영화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화가 나기도 하였다. 독일보다 더 강력한 힘을 자랑했던 체코가 어쩌다 이 모양인가? 프라하의 봄을 일으킨 불길을 이해 할 만도 한데, 지금 체코는 자본주의의 맛을 보고 돈 맛을 보아 돈을 벌기에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유명한 찰스다리를 건너며 사자 상을 보다가 딸이 다리에 모기를 많이 물린 것을 발견하고 약국에 가서 바르는 모기약을 하나 샀다.
[블타바강을 건너는 찰스 브릿지]
체코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낮 익은 슈퍼를 한 발견하였다.
테스코(TESCO), 영국의 양대 대형 슈퍼는 생스베리와 테스코이다. 생스베리는 영국본토인 자본으로 출자된 전국적인 망의 슈퍼이며 가장 인기가 있는 슈퍼이며, 테스코는 유대인 자본으로 구성된 대형슈퍼인데, 물건 값이 생스베리 보다 약간 싼 것이 이점이나 맛은 생스베리보다 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물론 비싼 것을 사면 맛이 있겠지만, 여기를 들려서 식료품을 좀 사갈 까 하다가 마침 부르스터 개스버너의 개스가 다 떨어지고 그 개스통을 사기가 어려워(있어도 매우 비쌌다) 연료에 문제가 있으므로 통상적인 삼발이 개스 버너와 어디가도 있는 삼발이에 끼워 쓸 수 있는 개스 연료통 하나 샀다.
왕궁 근처에서 복고할 돈이 없어 흙 속에 묻혀있는 왕궁 유적지를 보며 또 한 번 한 숨을 내 쉬었다. 체코에서 본 쇼핑 상품 중에 회중시계, 즉 양복 안 저고리에 넣고 다니는 시계가 특산품인 것을 보았는데 가격이 우리 호텔 하루 밤 잔 값하고 맞먹는 것을 보고 포기했는데 후일 여행하는 사람은 하나 사놔도 괜찮을 거란 생각을 두고두고 했다. 프라하를 뒤로하고 고속도로를 찾아 남으로 달렸다. 다음은 헝가리, 우리는 폴란드는 가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책에서 본 바 운전의 규제가 심하고 사실은 땅이 커서 길이 너무 멀었다. 집사람은 가고 싶어했으나 우리 여행이 단기간이므로 동구권은 이 정도만 하자는 나의 의견에 동의는 했지만 폴란드의 그 유명한 해바라기 바다를 못 본 것을 후회했다. 그런데 폴란드 국경 60마일 이전지점에서 차 주유를 하고 내달리기를 10분 정도하니 농장에 해바라기 밭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장관이었다. 이로서 아내의 요구는 얼마간 충족이 되었다. 체코를 벗어나 슬로바키아로 들어가는 국경이 나타나고 우리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차를 세워 검문을 받았다. 그런데 검문관이 차를 옆으로 빼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1만 오천원 가량하는 고속도로통행권 없이 고속도로에 진입하였다는 것이다. 통행권을 사지 않은 고속도로 통행자는 벌금 20만원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고속도로 통행료를 받는 나라도 있구나 라고 느꼈다. 그러나 여행객이 이를 알리만무다. 나는 영어로 이러 정보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 누구도 내가 고속도로에 들어올 때 알려주지 않았다 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다만 책을 가리키면서 돈을 내라는 것이었다. 일단 규칙이 그런데 돈을 내기는 내야 하는데 그냥 통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벌금 20만원을 낼 요량으로 여행자 수표를 내밀었더니 그런 것은 안받는 다고 한다. 그래, 이제 자본주의를 실험하는 네가 이 토마스 쿡 여행자 수표를 받겠니? 하고 생각하며 다시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나는 돈이 없다. 이 카드로 계산하자 했더니 수표나 카드는 안받는 다고 손을 내젓는다.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을 보니 현찰없냐고 하는 것 같아 없다고 하다가 문득 전에 좀 더 바꿔 둔 마르크가 있는 것 생각났다. 나는 오직 25마르크 밖에 없다라고 하며 보여줬더니, 받고서 통과시켜준다. 국경을 건너니 슬로바키아다. 여기도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야 하는 모양이다. 얼른 사무실로 가서 나머지 돈을 털어 슬로바키아 고속도로 통행료를 지불하고 차를 몰았다. 여기서 마르크의 위력을 실감했다. 이곳 동구권 사람들이 마르크를 달러처럼 좋아하는 것을 느꼈다. 슬로바키아는 고속도로로 통과만 하는 여정이었는데 도로변 전망은 매우 좋았다. 슬로바카아가 체코와 결별한 것은 수년전 인종적 종교적 갈등인 것 같았다. 슬로바키아에 대하여는 상세한 정보도 없고 비자가 되는 지도 점검을 하지 않아서 국경에서 입국이 허가되는 지 궁금했는데 만약 안 되면 체코로 돌아가야 하는데, 국경에서 별탈이 없었으므로 고속도로 통행권을 사서 차에 붙이고 지나갔다. 여기의 고속도로 통행권은 한국과는 매우 달랐다. 체코나 슬로바카아는 스티카처럼 차에 붙여서 통행권을 샀다는 표시를 해 주게 되어있었다. 나중에 유럽을 한 바퀴 돌고 보니까 유리창 한편의 4분지 1이 고속도로 통행스티카가 덕지덕지 붙여져 있었다. 한동안 여행의 여운을 즐기려 그대로 창에 붙이고 몇 개월간 그냥 다녔다. 마치 무슨 훈장 달고 다니듯.
슬로바키아를 통과하여 헝가리로 접어들어 바람이 심하게 불어 차가 기우뚱 거리 길래 타이어에 바람이 빠졌나 하여 주유소에 가서 타이어에 바람을 넣었는데, 그런데 장거리 주행을 하고 짐을 많이 실어 그런지 앞좌석의 한쪽 타이어 바람이 좀 빠져 있었다. 바람을 넣고 옆에 주유를 하는 아줌마에게 영어로 바람이 불어 차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다고 의사표시를 했더니 그녀도 차가 매우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차에는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을 감 잡고 헝가리로 들어가 부다페스트로 달렸다. 헝가리는 몽골족이 유럽 침공 시 많은 중앙아시아 문화와 인종을 남겨 우리와 비슷한 어투의 마자르 언어를 쓰고 생김새도 그렇다는 사전 지식을 가지고 갔는데 슬로바키아에서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고속도로 상에서 느낀 점은 다른 나라에서 나지 않는 소위 시골의 향기라는 인분냄새가 났다. 어허 이거 어째 우리하고 좀 비슷하다고 느꼈다. 우리도 과거 인분을 비료로 썼으므로 과거 고속도로나 지방도로를 달리다 보면 가끔 인분을 사용한 일정지역의 농토를 지날 때 인분냄새가 확 풍기는데 그런 식이다. 지금 글 쓰는 시점이 2002년 이므로 그 당시 한국의 농촌에서도 아직 인분냄새가 있었을 것이다. 헝가리의 고속도로는 참 괜찮다고 느꼈다. 도로 인프라를 새로 확충한 것 같았다. 다른 지역의 도로는 모르겠지만. 밤이 늦어 마땅히 잘 데를 못 구한채 부타페스트에 다와 갔는데 밤12시가 지날 무렵 수도에서 30마일 떨어진 휴게소 및 주유소에 차를 대고 차안에서 잠을 청하였다. 새벽 5시경 밖에서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잠을 깨어 보니 마치 한국의 버스관광객이 이동하다가 내려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 정경은 아주 한국적이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은 사람이 모여도 이렇게 왁자지껄하고 톤이 높은 대담은 들을 수 없었는데, 밖을 내다보니 호주머니에 손 넣고 담배를 피우며 떠드는 품이 영낙없이 한국사람과 비슷했다. 내가 헝가리인에 대하여 선입견이 있어서 그런지 더 그런 것 같았다. 하여튼 2시간 정도 더 참을 청한 후 휴게소에서 세면을 하고 서늘한 아침 바람을 쐬며 차를 몰아 아침 8시경 부다페스트 시내로 들어와 central 표지만을 보고 따라 갔는데 central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부다페스트의 여러 다리를 건너기 전에 호텔빌딩의 지하에 주차를 시킨다. 오전에 주위를 돌며 환전과 여행 정보를 얻어 대강 눈요기를 한 다음 차를 빼서 한적한 공터에 무료로 주차해 놓고, 그런데 8월 중순이라 그런지 햇볕이 우리나라 한 여름처럼 따가웠다. 이 무더운 햇빛을 뚫고 트램과 버스를 번갈아 이용하며 유명한 회교식 교회, 왕궁, 사원 등등을 전전하였는데, 수도인 부다페스트의 시내의 도로 사정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리고 기대와는 달리 시민의 모습은 영낙없이 유럽인이다. 마자르인 인지 뭔지 구분이 안 갔다. 식사를 제대로 못한 터에 밤 늦게 운전하면서 차에서 잠을 자서 그런지 피로를 느꼈다. 그런 차에 집사람이 여기 굴야시(gulyash)라는 독특한 음식이 있다고 하며 재래시장을 한번 가보자고 권하여 그곳을 찾아 갔다. 상당한 거리를 걷고 물어보고 하여 어느 가게에 들렸는데, 그 음식은 영낙없이 한국의 해장국이다. 돼지고기를 삶아 고은 국물을 고기와 같이 주는데, 여기에 붉은 고추를 빻아서 만든 칠리 소스를 넣고 소금을 쳐서 먹으면 아주 맛있는 해장국이 된다.
나도, 아이들도 정말 한 그릇씩 맛있게 먹었다. 여기에 큰 식빵을 썰어서 찍어 먹는데 근 1년 반 동안 못 먹어 보았던 해장국을 한 그릇 들이킨 것 같았다. 속이 든든하여 재래시장을 기웃거리니 여긴 과일 등이 거저 일 정도로 쌌다. 복숭아, 메론과 기타 음료수 등 장을 보아 들고 차로 돌아오니 저녁이 다 되었다. 다음 여정을 스위스로 잡았는데 가만히 보니 독일 땅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지나가야 했다. 인근의 도시들을 살피니 뮌헨이 가까웠고 그리로 방향을 잡기로 하였다. 밤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은 비가 내리고 불빛이 너무 강렬히 반사되어 힘이 들었다. 더욱이 동구에 가까운 동독지역을 다시 경유하므로 도로 사정이 말이 아니었다. 도로 인프라를 새로 만드느라 거의 독일 전 지역 고속도로가 공사를 하는데 고속도로에 이리저리 방패막을 세워 길을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좁은 곳을 지나느라 정말 애먹었다. 당장 어디에 서서 쉬고 싶은데 길은 좁고 차가 말도 못하게 길게 늘어서고 나가는 길도 없어서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