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31. 13:43ㆍ카테고리 없음
62 독일(뮌헨)
뮌헨은 매우 아름답고 잘 정돈된 도시였다. 깔끔한 독일 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도시였다. central 역에서 주차를 하고 여행정보를 받아 시내에 주차를 한 후 오전에 쉴새 없이 가족을 데리고 BMW 박물관, 과학박물관, 교회, 등을 전전하다 오후 2시가 넘어서 텐트장으로 향했다.
텐트장은 교외에 있었는데, 매우 컸다. 그런데 텐트장 오픈 시간이 오후 3시반 이어서 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입장할 수 있었다. 텐트장으로 가는 길에 시민들의 주택이 있는데 그 규모와 크기, 그리고 우아하고 잘 가꾼 정원과 대부분 차를 2대씩 가지고 사는 그들의 삶을 보고 감탄했다. 한 마디로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들은 수풀이 우거진 자연녹지에 자리 잡고 집은 숲 속에 하나씩 있는 것 같았다. 텐트를 치고 다시 시내로 나오는 길은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다. 그리고 전철역에서 내려서 다시 전철로 갈아타야 하는 조금 복잡한 경로를 이용 했는데, 버스와 전철요금은 아이들 에게는 무료였다. 역시 복지국가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시내로 나가는 길에 한국인을 한 사람 만났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부모는 60년대 광부와 간호원으로 파견오신 분이며 자기는 그분들의 2세라고 소개하였다. 대학에서 예술학을 정공하며 오늘은 전시회가 있어서 준비를 하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 우리가 텐트를 친 동네에서 나왔으므로 그 잘 사는 동네에서 사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국말을 더듬더듬 하기는 하는데 그 학생은 완전히 독일에 동화된 한국사람 이었다. 독일 뮌헨의 도시기반을 보면 우리나라의 대도시와 별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잘 닦인 도로, 전철, 버스, 쇼핑가, 바쁘고 무표정한 사람들. 다만 말만 다르고 생김새만 다르지 사는 것은 우리와 같은 것으로 보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독일은 전후에 자신이 가진 전통과 문화 기반 등 너무 많은 것을 전쟁을 통하여 잃어버린 것 같았다. 미군의 진주와 주둔 아래에서 전반적으로 사람들의 일상이 우리나라 처럼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아메리칸 스타일로 급속히 변화해가는 것 같았다. 영국과는 달리 독일은 패전국으로서 전후의 폐허를 깨고 부수어 새로 짓고 현재를 새로이 만들어 감으로서 과거의 쓰라린 기억과 거기에서 상처입은 전통을 잊어버리려고 몸부림치는 것 처럼 보였다, 그것은 통독이후 국가 전체가 이제 아직도 인프라 건설문제 때문에 천문학적 경비를 지출하고 있어 동독구역 전역이 몸살을 하고 진통을 겪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인은 자신의 머리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민족으로 스스로 자부하는 국민인데, 아직은 미국의 힘에 눌려 있으나 이들이 통일 후 기지개를 켜고 국민의 이해가 통합되는 날에는 세계가 어떻게 변할 지 아무도 모릉다. 독일 게르만 민족은 무서운 민족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그것은 그들이 생산하는 제품도 그렇지만 문학이나 철학 그리고 과학 분야를 보면 세계 탑이다.
예를 들어 철학에서 시간과 존재(Time & Being)를 쓴 현상주의 철학자 하이덱거는 현재 금세기 철학사상 중 가장 난해하고 심오한 경지를 보여준다. 그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존재를 4가지 개념으로 분리하고 이를 통합하는 논리분석적 과정을 통해 존재의 현상을 이해하고자 시도하였다.
지금 미국이나 소련, 영국 등이 보유하는 핵무기나 인공위성이나 기타 특수과학이론이나 지식은 거의 2차 대전이후 연합군이 전리품으로 가져간 독일의 유산이라는 보고서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영국에서 살면서 영국 내 독일인 중 로즈마리(Rosemarie)라는 80세가 넘은 할머니를 사회복지 서비스 팀에서 일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2차전 후 아버지가 독일 내 주둔하는 미군부대에서 근무한 까닭에 미국인 학교를 다녀 영어를 배우고 이후 영국에 건너와 영국남편을 만나 결혼하여 사별한 후 어머니를 모시면서 혼자 사는데, 그의 친어머니는 3번을 결혼한 경력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나이가 99살이며 아직 사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기운이 없어 늘 침대에 누워 있는다고 했다.. 어찌어찌 내가 그 집에 방문하여 그녀의 어머니인 서머캄 (Summerkamp)를 가끔 문안하고 돌보아 주었는데, 그녀는 늘 방문객과 이야기를 하기를 좋아하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기를 좋아했다. 덕분에 아침이면 조반, 점심이면 간단한 치즈나 비스켓과 커피, 저녁에는 포도주와 위스키 같은 음료를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런데 사람이 받기만 하고 가만히 있을 수많은 없었다. 나도 무언가 그녀를 기쁘게 해야 할만한 선물을 하고 싶었다. 이리저리 궁리를 한 끝에 한국에서 올 때 가지고 온 깜찍하게 작은 액자 속에 보관한 고색창연하고 아름다운 수를 놓은 골무 4개 세트가 있는 것을 찾아내어 그녀를 방문하는 길에 ‘로즈마리, 나는 당신에게 늘 신세를 지고 있어 당신의 관대함과 늘 환대해주는데 대하여 감사의 표시로 이 선물을 드립니다’. 라고 말하며 그것을 건냈더니 그녀는 그걸 들고 거실로 가지고 가서 뜯어보더니 ‘분더바’ (독일어로 원더풀)라고 고함을 지르며 나에게로 달려왔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달려오는 바람에 얼결에 그녀를 부등켜 안고 화장기 짙은 붉은 입술에 정면으로 키스를 하게 되었다. 멋적어서 그냥 웃었더니 나보고 너무 아름답다. 나는 이걸 내 일평생 꼭 간직하겠다 라고 하면서 연신 고맙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그녀와 연락을 하며 그녀의 어머니인 머티 (서머캄이 이름인 그녀의 어머니를 모두 머티(Mutty)라는 애칭으로 부른다)가 100살이 넘어서도 건강하고 몇 십 년을 더 잘 살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그녀의 어머니 섬머캄은 이듬해인 2004년에 학위수여를 받기위해 방문할 때 다시 가보니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녀는 젊어서 남편과 함께 그녀가 사는 인근마을에 상점을 여러 개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처분을 한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그 재산으로 인하여 집이 매우 크고 잘 살았다. 80대 중반의 그 나이에도 90살인 아더라는 영국인 친구를 사귀어서 집안일을 공유하고 휴가를 같이 가기도 한다. 둘 다 아직 운전도 하는데 로즈 마리는 자신을 속도광 이라고 한다.
아더 (Arthur)는 2차 대전 전에 영국 공군에서 전투기 비행기술을 가르치는 교관이었다고 한다. 전후에 보험회사를 다니다가 60이 넘어 은퇴 후 지금은 혼자 자식이 없이 로즈 마리와 붙어 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산다. 여하튼 독일인은 성격이 화끈하고 씀씀이 손이 크고 행동적이며, 부지런하다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