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29. 22:52ㆍ카테고리 없음
58. 노르웨이
노르웨이는 넓은 나라였다. 자료에 의하면 아주 북쪽으로 가면 핀란드와도 연결되며 거기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읺은 황야와 산지에서 북극의 오로라를 볼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그 길은 천마일 이상에 달하는 거리인데 과연 이차로 고장 없이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까 하는 의구심에서 북쪽 끝가지 올라가는 길은 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였다. 오슬로에서 숙소를 정하기로 하여 한 눈을 팔지 않고 오슬로까지 줄기차게 쉬지 않고 달려 거의 밤이 다 되어 저녁 8시경인가 되어 시내에 들어갈 수 있었다. 도시 입구에서는 특이한 도로구조 때문에 고생을 했다. 즉 도시입구부터 버스차선과 일반 차선이 구분되어 이를 비켜가느라 매우 조심스러웠고 힘들었다. 또한 도시 입구 톨게이트가 하나 있는데 도심 진입 시 약간의 통행료를 받는 곳인데 아마도 시내 교통체증을 막기 위하여 형식적으로 만들어 놓은 곳 같았다. 그런데 통과도로가 두 곳이 있는데 고속으로 질주하다가 빈 통로를 발견하고 지나갔는데 그곳은 관용차량이나 통행료 지불이 필요 없는 지정차량이 통과하는 곳으로 나중에 여행을 마치고 영국으로 돌아오니 20 파운드 짜리 벌금고지서 2통이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슬로 시내에서 길을 잃어버려 이 통로를 나도 모르게 두 번이나 통과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전부 카메라에 찍혀 번호를 조회하여 벌금고지서가 통보된 것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나라끼리 도로교통규칙을 어긴 경우 즉시 소속국가로 벌금 고지서가 날아오다니 참 유럽은 하나다 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오슬로로 진입하는 도로는 정말 굉장히 어려웠다. 그 이유는 시내로 가는 길은 남산 터널 처럼 지하로 진입을 하는데 지하에서 노선에 따라 나가는 통로가 있는데 그 안이 거미줄처럼 연결되고 통로가 많아 초행길인 나로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뒤에서 차는 사정없이 줄을 이어 따라오고 나는 어디론가로 가야하는데 가는 길의 행선지는 알 길이 없고 나중에는 할 수 없이 무조건 Central이라고 표시된 팻말을 따라 나갔다. 여기서부터 Central 이라는 것에 대하여 운전 중 이것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어로 Central은 나라를 지나면서, centro, Zentrum 등으로 단어가 바뀌었는데 도시 입구마다 이 표시는 반드시 있었고 이곳이 바로 중앙역이나 시내 중심가 중에서도 중심가이며 여행 안내소도 모두 그곳에 자리 잡고 호텔예약, 환전 등의 문제, 숙소안내, 관광안내를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일단 central로 나가 보니 시내인데 마땅히 차 세울 곳이 없어 술집이 즐비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없고 열린 가게는 우리나라 나이트 크럽 같은 술집에서 음악의 밴드소리만 크게 나오고 있을 뿐 이었다. 어느 나이트클럽의 옆에 있는 작은 간이 음식점에 들어가서 시내 인근에 있는 캠핑장을 믈으니 시에서 운영하는 큰게 시내 중앙에 있는데 길이 좀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옆의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아랍계 젊은이를 불러 가는 길을 물으니, 그 아랍 청년이 흔쾌히 자기가 안내해 줄테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그 친절한 아랍계 청년이 안내하는 대로 가니 캠핑장이 나오는데 정말 말로는 설명하기에는 복잡한 코스였다. 도착해보니 거기는 오슬로의 한 복판이고 높이 솟아오른 시내 복판의 남산 같은 곳이었다. 그곳의 언덕은 완전히 캠핑장으로 개발 되어 있었다. 캠프장 아래에는 넓은 잔디 축구구장으로 조성이 되어있는 굉장히 넓은 휴식시설이었다.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았다. 차의 국가 마크를 보니 영국은 물론 전 세계의 여행객이 다 몰려 있었다. 아마도 무슨 청소년 관련 국제행사가 열리는 모양이었다. 너무 늦게 가서 샤워장이 문을 닫아 샤워도 못하고 간신히 좁은 비탈진 언덕에 비스듬히 캠프를 쳐서 자리를 잡고 저녁을 간단히 라면과 김치로 해결하였다. 이곳은 오슬로의 중앙에 자리잡아 가장 높은 곳으로 밤이 되자 기온이 급강하 하고 바람이 몹시 불었다. 차로 텐트의 일부를 막아 바람을 막으니 바람이 강했지만 텐트안은 비교적 훈훈했다. 여기서 몹시 피로를 느꼈다. 시내 초입의 복잡한 지하도로에서 너무 긴장을 하고 캠프장을 찾는데 신경을 써서 그런지 텐트를 치자마자 기진맥진 하였다. 오슬로 자체는 그리 유명한 곳이 없어서 책에 안내된 대로 몇 군데를 선정하여 방문하기로 하고 그것이 끝나면 오후에 바로 피요르드로 다시 운전하기로 하고 아침에 짐을 챙겨서 중앙역으로 나왔다. 중앙역은 복합적으로 구성된 역, 상가, 금융기관 여행안내소 등 여행객을 위한 복합단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시청사와 미술관을 들러 시내를 대충 들러본 다음 여기서 만나기 어려운 한국 학생을 만나 그들과 일정에 대하여 정보를 교환하고-그들도 물론 피요르드를 보러 간다고 하였는데 그들은 기차 예약을 하여 간다고 하였다. 환전소를 거쳐 필요한 돈을 환전한 다음 시내를 둘러보았다.
오슬로에서 시내를 거닐다가 어느 빌딩 앞에 놓여진 TV 모니터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연설하는 비디오가 놓여있었다. 그 빌딩은 노벨평화상 관련 기록을 보유하고 홍보하는 빌딩인데 역대 노벨상을 수여한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었다. 노벨상은 스웨덴 한림원에서 수여하지만 노벨 평화상만은 노르웨이 왕립과학기술원(Norwegian Nobel Institute)이 관장하고 있기 때문에 노르웨이 오슬로에 그 자료가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상이었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소감을 발표하는 연설문이 오슬로 시내 중심지에서 계속 반복해서 상영되는 모습을 바라보니 어깨가 으쓱 하였다. 입구에서 안을 보니 역대 년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의 기념 기록물이 전시되고 있었다. 아이들 교육 겸, 비싼 가족 관람료를 지불하고 들어가서 노벨 연설문을 보고 또 보고 아이들과 어깨를 으쓱하며 자랑스럽게 설명을 해주었다. 아이들도 이 먼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자리잡은 노르웨이의 왕립과학기술원에 전시된 한국 대통령의 모습이 기념 전시관의 제일 전면에서 연설을 하는 모습이 전시된 것을 보고 기뻐해 마지 않았다.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나오면서도 고개를 돌려 못내 아쉬운 듯 보면서 작별을 고하였다.
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중앙역에서 차를 빼서 빠져나와 다시 복잡한 지하도로에서 이리저리 해메다가 길을 찾아 고속도로로 들어서서 베르겐으로 향했다. 오후 4시경에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달리니 여기서부터는 호수가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고속도로를 제대로 올라타서 4차선으로 된 도로를 달리다가 고장난 차를 구조대가 구조하는 모습을 보면서 관광객에 대한 노상 서비스가 신속하구나 라고 느꼈는데 고장 차의 운전사와 경찰, 불려온 응급구조 서비스가 같이 차의 펑크난 타이어를 수리하고 있었다. 처음에 나타난 호수는 무지하게 넓었다. 베르겐으로 가는 길은 오슬로에서부터 왼쪽으로 휘어져 노르웨이 서쪽으로 가는데 약 500마일 이상이 되는 걸로 지도상에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실은 베르겐 까지는 너무 멀어 우리는 베르겐 조금 못 미친 거리에 소재한 송내(Sonae) 피요르드로 가기로 목적지를 정하였다.
이곳도 피요르드의 중간에 위치하여 잘 형성된 피요르드를 볼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곳을 숙소로 하기로 하였다. 노르웨이는 호수의 나라로 유명한데 그 호수는 대부분 빙하가 있던 자리가 패이거나 얼음이 녹거나 하여 생긴 것이며 그 유명한 피요르드는 빙하가 산과 돌을 깍고 지나간 자리이다. 그야말로 산과 암석의 약한 부분이 날카롭게 직각으로 깎여 바다와 연결된 호수인데, 그 물의 색이 감청색으로 새파랗다 못하여 시퍼랬다. 나중에 이 호수물의 색은 스위스의 호수들과 비교되었다. 스위스의 호수는 알프스 산지의 골짜기에 있는 내륙에 있는데 운전을 하면서 보면 그 물색깔이 아주 부드러운 녹색이었다. 정말 물김을 풀어놓은 것 같은 연한 녹색인데, 노르웨이처럼 시퍼런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마 루체른처럼 항구를 낀 호반은 약간 색이 짙었으나 평원을 운전하면서 본 스위스의 호수는 연녹색으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스위스의 호수가 부드러운 여성이라면, 노르웨이의 짙푸른 호수나 피요르드는 검푸른 거친 남성으로 보일 수 있다. 처음 호수를 발견한 이래 호수는 계속 이어서 나타나고 호수 주위로는 그 유명한 노르웨이 북극의 침엽수림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오슬로에서 베르겐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이지만 어느새 길이 왕복 2차선으로 줄어들고 왕래하는 차는 별로 많지 않았다. 멀어서 대부분의 여행객은 이곳을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 혹은 페리를 여행하는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10분간 고속으로 내달려도 차 한대를 볼까말까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질을 넓게 만들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 고속도로는 매우 구불구불하고 영국의 B급 국도처럼 이리 휘고 저리 휘고 운전하는데 고도의 주의를 요하였다. 그 길은 줄 곳 침엽수림을 보면서 호반을 끼고 달리다가 다시 침엽수림으로, 그리고 또 침엽수림으로 달려야만 했다. 길은 영국의 하이랜드처럼 차츰 높아지기 시작하고 비가 흩뿌리기 시작하였다. 운전에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어두워지고 비가 흩뿌리고 앞에서 가끔 오는 차는 운전석이 이 나라와 달라 눈을 부시게 하여 속도를 늦추고 달려야 하는 운전에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약 200마일 정도 달리니 바위 산을 뚫은 굴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어떤 곳은 7-9마일에 달하는 긴 굴이 나타나다가 50-100미터 정도의 짧은 구간도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많은 굴을 뚫으면서 길을 닦은 사람들의 노고와 비용을 생각나게 만들었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햄버거와 감자 칩을 사먹으면서 이 악조건을 극복하여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수 백마일을 달렸다고 생각하며 또 하나의 굴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길을 들어섰는데, 이 굴은 좀체로 끝나지 않았다. 굴에 비치되어 있는 표지판을 보니 앞으로 27마일 이라는 표지가 지나가는 길에 언뜻 보였다. 그런데 평소에는 유심히 보지 않던 이 표지를 가만히 보면서 생각하니 앞으로도 26키로미터를 더 가야한다면 시속 100키로 미터로 20-30분은 달려야 하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설마 그렇게 길어? 하고 웃었는데 거짓이 아니었다. 이 굴이 바위산을 뚫어 만든 세계에서 가장 긴 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위굴을 26키로미터나 뚫어서, 그 굴을 달리는 중에 두 군데에 아주 인상적인 디자인의 장식을 했는데 공간을 둥글고 넓게 만들고 천장에 푸르스름한 조명을 만들어 마치 이글루의 한가운데 또는 빙하의 한가운데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도록 만들어 놓은 공간이 있었다. 그 중 한군데에 서서 사진 촬영을 하고 전방의 루트를 체크해보니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굴이 너무 길어 운전하면서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마치 끝도 없는 지옥으로 치닫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 굴을 빨리 지나기 위해 속도를 100 키로 미터 이상으로 올려 앞으로 앞으로만 달렸다. 우리가 굴을 무사히 빠져 나왔을 때에는 흩뿌리는 가랑비 속을 뚫고 차의 헤드라이트에 우리가 찾는 지명이 보였다. 세 갈래 길에서 찾은 표지판으로 우리 차를 몰고 간신히 나가니 피요르드 선착장이 보이고 엄청나게 큰 페리가 정박하고 있는 항구가 보였고, 거기에 호텔, 유스 호스텔과 캠핑장도 보였다. 일단 처음 보이는 곳이 숙소였다. 날씨가 좋고 일기가 좋아 시설이 좋은 켐핑장을 찾을 수 있으면 좋지만 일기가 오늘처럼 불순하고 늦은 저녁시간에 비까지 오는 경우는 일단 보이는 곳에 숙소를 잡는 것이 바람직했다. 캠핑장에 가니 자리가 없다고 한다. 이런 힘들게 되었구나 하고 고민을 하다가 지금 비가 내리고 어린아이도 있어 어디 귀퉁이에라도 켐프를 치게 해달라고 사정을 하였더니, 한쪽 공터를 가리키며 저곳은 내일 잔디를 깎기 위하여 비워둔 곳이니 내일 자리를 비워 달란다. 정오이전에 캠프를 철수 할 수 있으면 허락 하겠다고 하여 간신히 자리를 얻었다. 비가 와서 잔디가 젖어 있어 텐트를 치는데 좀 애를 먹었지만, 일단 텐트를 설치하자 자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다행히 이 텐트장은 별이 4개짜리인데, 시설이 그야말로 최고급 호텔 수준이었다. 그것은 샤워장과 화장실의 관리에서 그랬다. 모든 텐트장이 다 비슷비슷한데 별로서 등급을 나누는 것은 샤워장과 화장실의 고급스러움 그리고 수영장같은 레져 시설이 있는 경우 높은 등급으로 분류하였다. 이런 시설에서 이용객들은 시설에 낙서를 하거나 함부로 시설을 이용 할 수 없었다. 캠프를 치고 저녁을 준비하기 위하여 쌀을 씻으러 취사장에 가서 수돗물을 틀고 쌀을 씻는데 한국분이세요? 하는 말과 함께 시커멓고 건장한 사내 한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때 버너의 개스가 거의 다 떨어져가서 캠프장의 슈퍼에 가니 우리가 쓰는 부르스타 즉 넓적한 탁상용 개스버너의 가스는 팔지 않는 다고 하여 캠핑장에서 가스시설을 찾고 있었는데 불행히 여기는 그 시설이 없었다. 물론 개스는 조금 남아 있었지만 장거리 이동을 고려하여 조금은 비상시를 위하여 아껴두어야 했으므로 같은 타입의 가스를 찾고 있었다. 그 남자는 박종철씨였다. 박종철씨는 30대 중반의 재미교포인데 알라스카에서 유전사업에 종사하는 젊고 잘생긴 장래가 유망한 인재였다. 그의 도움으로 그의 버너를 빌려서 사용하면서 미안하여 김치를 병에 담아 조금 나누어 주었다. 그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나 매년 여름휴가는 미국 알라스카에서 이곳으로 비행기로 날아와 이 캠핑장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그도 역시 확실히 서구화된 패턴으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보통의 서구인이 조용하고 경치 좋은 아무도 모르는데서 1-2주일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좋은 요리와 와인을 마시며 게으른 날들을 보내듯이... 그는 이곳을 찾은 지 약 5년가량 된다고 하였다. 결혼을 했냐고 물으니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 사실은 최근 교제하는 여자가 생겨서 마음을 정하려고 한다고 고백하였다. 사실 나는 과년한 처제가 하나 있는데 아직 미혼이었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 의류 디자이너로 대학졸업 후 이랜드에 들어가서 4-5년간 경험 후 뉴욕의 컬럼비아 MD(marketing designer) school 로 유학을 하고 귀국하여 그 회사에서 2002년 최우수 사원으로 선발될 만큼 열심히 일하고 (나도 이것을 인터넷에서 TV를 보고 알았지만) 있는 유망한 의류 디자이너이지만 아직 제 앞가림을 못하는 상태라 혹시나 해서 중매나 서려고 했었는데 무위로 돌아갔다. 박군의 도움으로 저녁을 넉넉하게 지어먹을 수 있었다. 비가오고 바람이 불어 추웠으나 따뜻한 텐트 안에서 아주 포근하게 잘 수 있었다. 끝없는 길고 지옥같은 터널을 지나면서 아주 피곤한 상태에서 신선한 공기가 감도는 피요르드의 입구에서 만년설이 이룬 빙하가 남긴 자취를 음미하면서 내일을 기약하며 깊고 달콤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우리가 자리잡은 송내는 상당히 북쪽이라 한여름인데도 날씨가 불순하고 추웠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켐프장 관리인에게 약속한 대로 잔디를 깎도록 비워주기 위하여 차에다 짐을 꾸리고 잔디에서 바깥쪽으로 차를 치웠다. 캠프장에서 바로 앞이 피요르드가 시작되는 하구 같은 곳이며 거기엔 도버에서 탔던 것보다 더 크고 화려한 유람선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작은 관광선이 피요르드를 보기 위하여 몰려드는 관광객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고 있었다.
피요르드는 사실 일반적인 산에 있는 큰 골짜기에 물이 들어온 것과 같다. 다만 그것이 의미 있는 것은 오래 전에 빙하가 산과 땅을 파고 지나간 엄청난 자연력의 징표이므로 이런 지질학적인 상식에서 각 피요르드의 구간마다 얼마나 절묘하게 바위산이 깍여서 보기 좋은 경치를 이루는지를 보는 것이 감상요령일 것이다. 그리고 깊은 피요르드 계곡 건너편에 교통이 두절된 채 자리한 산 밑에 하나의 오두막, 그리고 격리된 소규모의 마을들, 피요르드에 연한 작은 농장가운데의 몇 채의 농가, 그리고 노르웨이의 특이한 가옥구조를 보는 것이 관광의 포인트인 것 같았다. 그 가옥들은 나무로 단순하게 지은 사각의 헛간같이 생긴 것인데 나무로 덧붙인 벽체는 붉은 페인트칠을 하고 지붕은 어두운 회색을 칠한 독특한 노르웨이만의 건축형태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송내 피요르드에는 이 밖에도 관광객을 실은 배가 피요르트의 골짜기로 출발을 하자마자 반갑다는 듯이 바다 물개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주위에 모여들기도 하고 혹은 멀리서 친구와 놀거나 연안의 바위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게 볼거리였다. 노르웨이는 한 눈에도 인구밀도가 매우 낮게 보였다.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는 호반과 침엽수림, 그 사이로 보이는 한 두 채의 집과 소규모의 마을들이 이를 대변하고 있었다. 이곳의 피요르드는 자연력에 대한 숭고함을 느끼게 하고 빙하기와 간빙기의 사이에 있었던 빙하의 이동이 이룬 증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송내의 피요르드 안으로 10여 키로미터를 왕복하는 배를 타면서 보니 한 무리의 동양인이 타는데 보니 그 배의 3분지 2가 전부 한국인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여행문화가 유럽의 상당히 비싸고 깊숙한 곳까지 도달한 것을 확인하였다. 기차로 도착하여 호텔을 이용하는 한 무리의 단체여행객은 인솔자의 인도아래 배 한 척을 점령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이 관광선을 타고 피요르드를 보는 정도에서 피요르드 체험은 만족하기로 하였다. 사실 그 이상을 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다 같은 장관만 반복하여 연출될 뿐이었다. 사실은 피요르드 여행은 여러 코스가 있는 것 같았다. 산행을 하여 주요 지점에 가서 즉 절벽 꼭대기에서 밑을 보는 코스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시간상 우리는 배를 타고 주요 지점을 둘러보는 것에 만족을 하여야만 했다. 베르겐의 피요르드 여행도 여기서 더 들어 가야 하는데 비슷할 걸로 생각이 되었다. 나는 피요르드가 바다에 연하여 각종 해산물로 된 먹거리가 있지 않을 까 기대하였으나 송내에서는 전혀 그런 것은 없었다. 다만 관광 정보지를 보면 베르겐에서는 싱싱한 생선과 이를 요리하는 레스토랑이 있다는 자료는 많이 볼 수 있었다. 오전에 피요르드를 둘러본 다음 캠핑장으로 복귀하여 신속히 철수를 서둘렀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다시 500여 마일을 달려야 한다는 계획에 맞추기 위하여 서둘렀다.
[스웨덴, 스톡홀름 전경]
스톡홀름은 동쪽의 해변에 연한 도시인데 베르겐과는 완전 반대이므로 노르웨이의 허리를 가로 질러서 내려가야 했다. 켐핑장에서 조금 벗어나서 작은 선착정이 있는 도시에 들러 쇼핑을 했는데 부족한 영양을 보충하기 위하여 양념이 된 포크덩어리(한국으로 치면 불고기를 위한 양념된 불고기 재료) , 와인, 쌀, 빵, 파스타와 소스 등을 충분히 사서 스톡홀름까지 운전 중 빵에 햄을 넣어 식사로 대용을 하였다. 가는 길은 오는 길보다 좀 쉬웠다. 한번 지나온 길이므로, 그러나 27키로미터의 긴 터널은 역시 어려웠다. 쉬지 않고 최대한 악셀을 밟아 빨리 빠져 나오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이 들어 그렇게 하였다. 그런데 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몇백마일을 달려 날이 어둑어둑하고 비가 뿌려 할 수 없이 다시 캠핑장을 찾았다. 노르웨이에서 캠핑장은 거의 1km마다 있었다. 침엽수림 사이에 호반의 근처에서 우리가 머문 캠핑장에는 80이 넘은 것 같은 몸의 거동도 불편한 할머니 혼자 운영하는 곳인데 거의 헐값에 대여하는 것처럼 싼 곳인데 우리 밖에 이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너른 텐트장에 텐트를 마음에 드는 장소에 치고 요리를 해먹고 잘 지냈는데, 이 캠핑장은 화장실이 매우 특이했다. 바이킹족이 오래전에 쓰던 구식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은 교회의자 같이 생긴 긴 나무판자바닥에 동그란 구멍을 뚫어 아래로 변이 떨어지도록 만든 곳이다. 마치 한국의 절에 가면 변이 떨어지는 것이 보이듯이 밑에 고인 똥이 다 보였다. 그리고 그 냄새도 그대로 맡을 수 있었다. 일을 보는 옆에도 하나 더 구멍을 뚫어놓아 사이좋게 앉아서 볼일을 보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노르웨이의 전통적인 변 냄새가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약간은 구수한 소세지 냄새가 난다는 사실이다. 궁금하면 한번 노르웨이의 별 두 개짜리 낮은 등급의 개인이 운영하는 오래된 텐트장을 찾아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