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7. 10:18ㆍ문학/소설
깃털(Feathers)
[2024.11.1.- ]
가을이다. 단풍이 드는 것 보다 온기를 뺏어가는 공기의 움직임이 피부로 먼저 느껴진다. 빼앗아 간 온기를 어디에 내려놓는 지 알 수 없다. 지구 어딘가 이겠지 아니면 우주 어딘가에, 봄은 온기를 품은 아지랑이를 몰고 와 당신 앞에 내려놓지만 가을은 어디론지 온기를 덜어가고 서늘한 냉기만 남긴다. 그리고 청소하듯이 낙엽 따위를 몰고 가버린다. 가을 찬바람은 이별을 예고하고 가는 아쉬운 실종 같으나 사람들은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가을은 남성의 계절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울지 않기로 했다. 봄바람은 공간을 온기로 채워 넣으러 오지만 가을 회오리는 기다림을 데려가고 작별을 고하는 공간들의 행위를 누가 책임지고 누가 말릴 수 있으랴. 바람이 낙엽을 몰고서 일어난다. 이름 모를 새 깃털 하나가 날리며 움직인다. 작은 것이지만 공간을 쓸어서 저쪽 지평선으로 생각을 몰고 가듯이 공간을 몰고간다. 그리고 지평선에 이르러 하늘과 땅을 연결해준다.
가을 이때 쯤 종배는 늘 찾아오는 좌골 신경통을 자신에게 호소한다. 그것이 여름내 즐기던 테니스 운동의 후유증인 줄 알면서도 애써 왜 신경통이 도졌는지는 함구한다. 그리고 늘 가던 402동 아파트 901호 음양오행침구사 할머니를 찾는다.
“그걸 뜯어서 쌀알만 하게 20개만 만들어 놔.”
음양오행침구사 박할머니는 종배를 보지도 않고 휠체어에 앉은 채 음양침구법을 정리한 노트에서 뭔가를 찾듯이 눈을 찡그리고 보면서 말한다. 그녀는 늘 묻는 질문을 한다.
몇 월 몇 일 생이라고 했지?
음력으로 5월 초엿새여유.“
음양오행침구사는 답변을 들으면서 노트를 한번 훑어보고는 엄지손가락으로 검지와 중지의 마디를 짚어가며 무언가를 헤아리더니 딱 멈추고는 노트에 무슨 숫자를 쓰고 동그라미를 치더니 침구를 꺼내 사용할 침을 골라 챙겨서 검정헝겊 위에 늘어놓고 그 옆에 성냥과 향, 그리고 뜸을 가져다 놓고 뜸뜰 준비도 한다.
종배는 그녀를 음양오행침구사라고 불렀다. 음양오행침구사는 한의사였던 자신의 부친이 정립한 음양오행침법에 따라 부친에게 배운 침술을 동네 주민들에게 시술했다. 가끔 그녀는 경기도에서도 환자가 200 리도 넘는 공주까지 자신을 찾아와 침과 뜸으로 치료를 받았다고 자랑하였다.
해방 전에는 한의사에 대한 정식 자격수여과정이 없어 대대로 배운 기술로 의사가 되기도 했다. 음양오행침구사 박할머니의 부친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녀도 물론 그런 신분으로 침과 뜸 시술을 행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정식 의사교육을 받고 의사 자격증을 가졌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누구나, 언제든지 2만원만 내면 음양침법과 뜸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용하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런지 경기도에서도 환자가 200리가 넘는 길을 달려 공주에 까지 오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늘 되풀이 한다. 무슨 암을 고쳤다는 소문도 있지만 궂이 누구인지 아무도 확인하려 들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우선 일차적인 고통을 덜어주는 신묘한 침술과 뜸 처방에 반하여 동내의 단골도 여럿 생겼다.
음양오행침구사는 손바닥 만한 비닐봉지에 든 말린 쑥 뭉치를 찾아 종배 앞에서 들고 흔들며 쌀알 만한 뜸 20개를 만들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똑딱이 처럼 횡으로 된 요철로 잠글 수 있는 쑥 비닐봉지를 종배에게 밀어놓는다.
“네 할머니.”
‘몇 자리나 그리고 몇 번씩 뜰건가?’
박 할머니 맘인디..그래도 뜸은 1,3,5,7,9 와 같이 홀수로 떠야하는데, 쑥 알갱이를 짝수인 20개로 만들라는 말에는 늘 불만이었다. 단지 짝수이기 때문이다.
종배는 음양침구사를 할머니를 의사로 극진히 대우했다. 그래서 언제나 박 할머니에게 침을 맞으러 오면 그녀가 지시하는 사항은 틀림없이 두 말 않고 이행했다. 침구사 앞에서는 늘 긴장되고 지시하는 말을 잘 들어야 뜸이든 침이든 아프지 않게 시술 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직구로 맨살에 뜨는 쑥뜸은 맨살에 쌀알 만한 쑥 알갱이를 올려놓고 뜨는데, 피부에 닿는 곳은 침을 살짝 묻혀 피부에 잘 붙게 하고 또 타는 시간도 좀 더 연장시키는데 그 짧게 타는 순간은 미녀가 손톱으로 맨살을 꼬집고 지나가듯 타는 고통이 있지만 뒤이어 매니큐어 향이 뿌리는 듯한 황홀감을 후각과 피부에 남기는 매력이 있다. 종배는 초가을이 주는 알싸한 오한보다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옷을 벗고 시술 받을 직구 쑥뜸과 침 치료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쑥 알갱이를 빛을 때 쌀알보다 더 작게 만들면 타는 시간을 줄여 고통을 덜 수는 있지만 바로 박할머니의 호통이 떨어진다.
“너무 작어, 두 개를 하나로 뭉쳐! ”
이런 소릴 들으면 고통이 길어짐을 기대하여야 하고 거기에 에누리나 할인이나 천국은 박탈당하고 없다. 하나의 뜸이 다 타는 데는 향이 쑥에 지른 불씨가 붙고 나서 5초 정도 걸렸다. 불씨가 완전히 꺼지려면 추가로 4초가 더 걸렸다. 이때가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그러나 추가 4초가 지나면 고통 후에 밀려오는 천국이 나루터에 대기하고 너를 만난다. 쌀알 같은 모양의 쑥을 뜸자리에 올려놓을 때 불타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몰려오지만 속 불이 꺼진 다음 2-3초 후에 밀려드는 안식은 처음 만나는 두려움을 상쇄한다. 10초 상관에 천국과 지옥이 번갈아 가며 종배를 방문한다. 뜸과 침 치료를 받을 때마다 종배는 천국을 기대하며 지옥문으로 들어가지만, 정말로 두려운 것은 천국은 오지 않고 지옥만 계속된다면 인생은 어떻게 쫑날 것인가? 에 대한 노파심이다. 그럴 때마다 천국이 없는 지옥만 계속되는 세상은 살지 않도록 마음을 추스린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그리는 성모 마리아상을 향해 그렇게 인생을 잘 살아가도록 기원을 한다. 매번 같은 절차였지만, 그 절차 속에서 무엇인가 신비로운 힘이 작용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박할머니의 침과 뜸은 단순히 신체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박할머니는 언제나 침술과 뜸 시술을 통해 몸의 불균형을 바로잡고, 그로 인해 환자들에게 안식과 치유를 선물했다. 종배는 매번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스한 기운을 느끼며 고통을 덜어냈다. 특히, 뜸을 다룰 때마다 박할머니는 향으로 시작하여 깃털로 마무리하곤 했다. 그녀가 사용하는 향은 단순히 불씨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깃털도 단순히 뜸 재를 털어내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신성한 의식처럼, 모든 고통과 부정적인 에너지를 한 점으로 모아서 밖으로 쓸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행위였다. 1뜸이 마무리되면 향이 풍기는 공기의 냄새는 후각을 황홀하게 자극하여 졸음을 주고, 깃털이 피부에 주는 쓰다듬은 처녀가 첫 날밤을 치르기 위하여 족두리를 벗기고 여인의 속곳을 내리던 훤출 신랑의 손등이 음부 둔덕을 스치면서 일으키는 스파크 같은 것이었다.
그 깃털이 종배의 피부를 스칠 때마다, 그가 느끼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인 감각을 넘어서, 몸과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경험이었다. 깃털이 지나가며 남은 잔여물은 그저 외부로 내버려지지 않고, 그를 감싸는 공기처럼 부드럽게 치워져 가는 것 같았다. 마치 그 깃털이 내면의 고통을 모아서 정화하여 외부로 분출하는 작업을 하는 듯했다.
그렇게 깃털은 음양오행 침구사 박할머니에게는 침과 뜸 시술에서 비장의 무기가 되었다. 그것은 음양오행침구법을 기록한 수첩 맨 뒷장에 끼워 둔 이름 모를 새의 깃털이다. 아마도 성장한 참새나 까치의 손상되지 않고 빠진 깃털일 것이다. 여유분도 두어 개 더 있다. 깃털 뿌리를 잡고 비로 쓸 듯이 뜸이 탄재를 몇 번 쓸어주면 쑥뜸 재를 피부에서 말끔히 치울 수 있다. 이것은 분쟁지역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말끔히 정리하는 영웅적인 힘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분명 깃털 하나면 10년 이상 사용해도 닳지 않을 것 같다. 깃털이 피부 위를 쓸어버릴 때 느낌은 거의 공기가 지나가는 것 같은 엷고도 아주 부드러운 것이다. 그것은 그러므로 등기소의 청산소(clearing house) 같이 말끔히 분쟁(재)을 정리하는 것이다. 깃털로 뜸뜬 부위를 쓰는 행위는 종배가 뜸 치료를 받으면서 가장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은 천국 다음의 평온함을 주는 제2의 안식처이자 지옥과 천국을 오르내리는 긴장감을 없애주는 종결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깃털을 사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깃털로 다 탄 뜸 재를 약식으로 털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짧게 건성으로 재를 털어내는 방식이며 뜸이 타는 진행 중에 터는 행위다. 유약한 솜같은 깃털은 물론 날이서서 강인하고 단단한 외부깃털도 있지만 이들은 남아있는 불씨에 간혹 손상되기도 한다. 깃털을 사용하는 다른 하나의 방법은 길게 재를 털어내는 방식으로 깃털의 얇은 털 부위를 활용하여 뜸자리 외곽에서부터 길게 쓸어내는 방식으로 뜸이 끝났다는 신호이다. 종배는 늘 이 두 번째 방식의 깃털로 쓰는 재털이 행위가 있으면 가장 큰 안도를 느꼈다. 마이크로 단위의 청소 같은 깃털사용법은 아늑하고 환상적이었다.
소년 예수는 동년배(아마도 10대 였을 것이다)들과 놀면서 진흙으로 동물을 만들었다. 그 동물들은 소년예수가 신호를 하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참새도 빚었다. 그리고 그들을 날려 보냈다. 이웃 사람들은 그를 마술사라고 하면서 자신의 아이들을 그로부터 격리 시키려고 했다. 예수가 진흙으로 빚은 참새를 날려 보내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흙으로 빚은 동물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범인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에 의해 허공으로 날려버리지나 않을 까봐 두려웠다. 소년 예수는 우주의 만물에 대해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 절대 권력은 흙으로 빛은 무생물에 대하여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을 뿐 만 아니라 날개 짓을 하며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게 만들었다. 흙으로 빚은 참새가 움직이다가 날아가는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며 집으로 끌고 들어가며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는 마법사이니 그와 놀지 말라고 속삭이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실 흙으로 새를 만들어 날려 보낸 사건은 예수의 전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창조의 행위를 보여 준 것이다. 창세는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새를 자유롭게 날아가도록 해방시켜 주었으니 새에게 날아갈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하였고 또한 날아가도록 버려두었으니 자유를 준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사랑이자 거부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의 행사요.
성부-성자-성령은 일체이니 여호와의 창조행위는 소년예수가 행한 흙으로 동물 빚기와 뭐가 달라? 같은 행위지. 참새를 날린 행위는 더욱더 소년 예수의 신과 일체성을 강하게 해준다. 참새는 날아가면서 가장 큰 날개깃을 한 장 떨어뜨리고 갔다. 그 깃털은 노란색으로 물들어가는 잔디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기다림에 들어갔다. 창조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소년 예수는 깃털을 허공으로 들어 올려 회오리를 그리며 내려오는 깃털을 잡았다. 그리고 말없이 허공을 한번 쓸어내렸다. 무지개가 그려졌다. 그것은 한동안 빛을 뿜었다. 무지개가 머금은 나무, 집, 공간은 움직임이 없이 빛났다. 종배는 음양오행침구사 박할머니가 쓸어내리는 깃털이 지나가는 느낌을 다시 생각했다. 예수가 참새에게 생명과 자유를 부여한 것처럼, 박할머니의 깃털은 종배에게 물리적 치유뿐만 아니라, 정신적 해방도 선물하고 있었다. 깃털이 지나가면서 그의 몸에서 고통이 사라지고, 마치 새가 힘찬 날개 짓을 하는 듯 기운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예수가 참새를 하늘로 날려 보낸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그 순간을 통해 모든 것을 해방시키고 정화하는 경험이었다. 음양오행침구사 박할머니의 손에서 깃털이 마지막으로 지나간 뒤, 종배는 고요함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공간의 변화를 느꼈다. 그의 몸은 이제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졌고, 마음속에서 불필요한 짐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그는 깨달았다. 음양오행침구사 박할머니의 깃털은 단순히 뜸 재를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불안, 두려움을 밖으로 내보내는 동시에, 그에게 새로운 시작과 자유를 부여하는 중요한 행위였다는 것을.
그렇다면 예수가 참새에게 생명과 자유를 부여한 그 행위와, 박할머니의 깃털이 고통을 씻어내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같은 맥락에 있었다. 그것은 창조의 과정이었다. 예수는 흙으로 만든 참새에게 자유를 주었고, 박할머니는 깃털을 통해 종배에게 치유와 자유를 주었다. 두 행위 모두 생명의 흐름을 되돌려 놓고, 각자에게 새로운 시작을 선사하는 행위였으며,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치유를 넘어서, 정신적, 영적인 해방을 의미했다. 종배는 자신의 고통이 사라지는 그 순간, 마치 예수가 참새에게 날아갈 자유를 준 것처럼, 그도 새로운 삶을 향해 날아가는 자유를 얻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감동과 함께, 점차 가벼운 바람처럼 마음을 휘감았다. 박할머니의 깃털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치유의 의식을 완성하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종배는 그가 받았던 치유의 행위를 통해, 결국 인간과 창조, 자유와 해방이 깊은 곳에서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깃털이 지나간 자리는 이제 더 이상 아픔이나 고통이 아닌, 새로운 시작과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종배는 성경에서 참새를 이용한 비유들을 상기하여 보았다. 구약성경에서는 고독과 슬픔 속에 있는 시인의 마음을 참새의 외로움에 비유합니다.
(시편 84:3)
"만군의 여호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하나님의 집을 사랑하며 그곳을 안전한 피난처로 삼는 모습을 참새에 비유합니다.
(시편 102:7)
"나는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으며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참새라는 작은 존재를 통해 하나님의 섬세한 돌보심과 인간의 가치를 깨닫게 합니다.
(마태복음 10:29-31)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나님이 작은 참새도 돌보신다는 점을 통해 인간의 소중함을 강조합니다.
(누가복음 12:6-7)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 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 도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이 구절은 위의 마태복음 구절과 비슷한 내용으로, 참새의 가치조차 하나님께는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