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0. 00:10ㆍ여행
9. 영국의 종교
한국에서도 서구사회(western)라는 말과 서구화(westernised)되었다는 개념에는 기독교화 되었다는 생각을 가질 정도로 유럽문명은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종교의 유파나 그의 이념에 대하여는 역사적으로 각각의 교리가 복잡다기하여 이를 일일이 다 분류하고 분석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다. 내가 한국에서 교회에 다니던 분위기에 비교하여 보면 영국의 경우는 별로 기독교 신자가 없는 것 같다. 이것은 교회에 출석하는 신도수를 보거나 일상적으로 학교에서 마주치는 젊은이를 보고 교회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젓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교회를 나가보면 노인네가 다수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나 자신의 지각으로 교회에 다니는 한국인은 비교적 도덕적 윤리적 수준이 신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높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할 경우 보통 영국의 일반인의 도덕이나 윤리 수준 혹은 예절 수준은 일반적으로 높다고 보여 진다. 굳이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자신이 높은 수준의 교양과 도덕심을 가지면 된다는 것 같은 느낌. 왜 교회를 다녀야 하는가? 라고 꼭 되물을 것 같은 그들의 얼굴에는 교회를 다니지 않더라도 전혀 신으로부터 배척을 받을 것 같지 않는 인상을 받는다. 한국에서는 기독교에서 믿지 않고 경배하지 않고 헌금하지 않으면 원죄가 되살아나 구원을 받지 못할 것 같은 느낌에 비하여 여기 영국사회에서는 그런 위기감은 보이지 않는다. 흔히 유학생들은 도움을 받는 수단으로 교회를 택하는데, 나도 언어문제, 사는 문제, 아이들 언어 교육문제 등으로 인하여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내가 장로교 신도이므로 장로회(Presbyterian)를 찾았는데 귀국할 때까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영국에도 여러 종파, 즉 카톨릭, 감리교, 여호와증인 등등이 있었는데 거의 영국에서는 국교인 성공회가 교구(Parish)를 중심으로 가장 많이 있었다.
[ 엑시터 성당]
영국에서 성공화가 성립된 배경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튜더왕조시대 헨리7세의 상속자인 아더(Arthur)왕자는 나이가 들어 스페인의 공주인 캐터린(Catherine)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 4개월 만에 아더가 병으로 죽었다. 당시 1500대 중반, 스페인은 영국보다 힘이 강하여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캐터린이 왕의 상속자와 결혼하도록 하는데 합의하였다. 그런데 1차 상속자인 아더 왕자가 죽었으므로 다음 상속자인 아더 왕자의 동생인 헨리(나중에 헨리8세가 됨)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 결혼은 정략적이며 애정이 없는 결혼이었다. 헨리8세는 당시 엠볼레이라는 시녀를 좋아했는데 그녀와 결혼하기 위하여 현재 부인인 캐터린과 이혼을 하여야 했다. 그런데 당시 로마교황의 세력 하에 있던 영국은 교회법에 의하여 왕의 이혼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헨리8세는 결혼을 위하여 로마교회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국가의 종교체제를 독자적으로 확립하기 위하여 오늘의 독자적인 성공회제도를 발전시켰다. 즉 영국교회의 최고 지도자는 영국 왕이며 로마법에서 금지하는 여러 규제로부터 벗어났다.
[헨리 8세 영국왕]
헨리8세는 스페인공주인 캐터린이 딸을 낳았다는 이유로 그녀와 이혼하고 엠볼레이로부터 아들을 낳아 왕위를 계승하고자 한다는 이유로 엠볼레이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국민 앞에 아들을 낳기 위하여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였는데 엠볼레이 역시 딸만 둘을 낳게 되어 국민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여 엠볼레이는 처형을 당한다. 그 후 헨리 8세는 4명의 여자와 결혼하여 총 6명의 여자와 결혼을 하였다. 헨리8세 이후 스페인 공주 캐터린의 딸 중 메리공주가 왕위에 올라 엄마의 복수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많은 사람을 죽여 ‘피의 메리’라고 불렸다. 헨리8세가 남긴 유명한 말은 ‘만일 사자가 자기의 강함을 인식한다면, 어느 남자도 사자를 부리지 못할 것이다’.
즉 사람이 사자를 부릴 수 있는 것은 사자가 자기가 강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국은 정치 경제적으로 세계에 영향을 미쳤지만 근대에 이르러 종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 듯하다. 웨슬리가 영국에서 빈민을 위주로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하면서 귀족층의 종교인 성공회에 대항한 것이 오늘날 감리교와 성결교가 되었다는데 그것이 영국에서 시발되었다고 한다.
[죤 웨슬리 : 1703-1791]
영국에 정착한지 한 달 만에 교회를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이리저리 물어보았으나 아무도 장로교가 어디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하루는 일요일 아침 일찍 시내로 나와서 멀리 교회 종탑 하나를 발견하였다. 물론 시내 가운데 엑시터의 성 피터 커시드럴이라는 중앙 교회가 하나 있었고 이는 옛날부터 지역의 정치적 조직화를 위한 교회로서 지방의 수도(Capital)에 세운 교회-가 있었지만, 너무 규모가 크고 고풍스럽고 해서 그곳은 피했다. 가족과 같이 종탑을 보고 걸어가서 발견한 교회가 2년간 거의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출석한 성 레오나드 교회였다.
[엑시터의 성 레오나드 교회]
이 교회는 약 500명 정도가 한 번에 예배를 드리는데 이만한 규모의 교회는 대규모에 속한다고 한다. 한국의 교회는 어지간하면 이 정도 되는데 보통 시내의 교회들은 40-50명 정도가 한 번에 예배를 보는 정도의 교회가 보통 수준이었다. 교회는 물심양면으로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처음에는 영어를 공부한답시고 목사님말씀을 하나도 안 빼고 들었지만 설교를 듣다 지치면 졸기도 했다. 주 목사님은 이름이 데이비드(David Harris)로 나도 영국에서 영국이름을 데이비드(David Leeh)로 쓰는지라 이름 때문에 서로 관심을 가지고 만나면 늘 반가워했다.
[David Harris 목사님]
부목사가 두 분 계셨는데 한 분은 귀를 뚫고 귀걸이를 하고 있어서 처음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한국이라면 연예인이나 주먹이나 쓰는 사람이나 문신을 하고 귀, 코, 배꼽을 뚫는데 부 목사님이 귀를 뚫고 장식을 하는 것은 여기서 처음 보았기 때문에 매우 이상했지만, 여기서는 타투(문신)이나 페니트레이션(살 뚫고 장식하기)이 보편적이라 나중에는 자주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예배는 통상 카톨릭의 성찬식이 섞인 그리고 일반적 기독교(즉 장로교)의 형식으로 찬송과 기도문 독송이 섞여있었다. 한마디로 가톨릭과 개신교혼합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릴 때 가톨릭 신앙과 젊을 때부터 장로교도의 경험으로 인하여 별로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영국의 종교와 관련하여 성공회는 교구를 Parish 라고 부르면서 주(지방의 도정도)마다 주도(주의 수도, 도청소재지)에는 커시드럴이라고 불리는 큰 교회가 하나씩 있는데 이것은 매우 장엄하고 돌을 깎아 만든 온갖 조각과 장식을 하고 매우 엄숙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가는 주요도시마다 하나씩 있는데 한국의 불교 사찰을 경쟁적으로 지었듯이 그 건축의 양식과 기법 그리고 거기에 쏟은 정성이 다 다르고 , 한마디로 경쟁적이었다. 이것은 유럽20개국 42개 도시마다 서구인의 관광지나 순례지로서 도시마다 있는 교회를 보는 것이 그들의 과업이었다. 마치 한국에서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절을 구경하러 다니듯, 서구인은 옛날에 지어놓은 이름 있는 교회나 성당을 보는 것을 필생의 일로 삼거나 관광 코스로 되어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물론 영국에서도 이 도시 저 도시에서 많이 교회를 본 연고로 무심히 지나치려 했으나 성당도 그저 비슷비슷한 것만은 아니었다. 전부 비슷비슷하게 생긴 성당을 어떻게 관람하고 음미를 할 것인가는 그 교회의 건축, 유리의 스테인드글라스, 소장품, 지하무덤, 내부 장식, 종탑 올라가서 경치보기, 역사를 알기, 등등 그 특성에 따라서 감상을 하여야 하는데 처음에는 너무 조급히 들어갔다 외형만 보고 나온 것 같았다. 유럽의 각 국을 돌면서 제일 많이 방문한 것은 교회이며 방문할수록 신기하고 이상한 것도 많이 볼 수 있었다. 예수의 보혈을 가지고 있다는 벨기에의 베르겐 성당, 거기에 걸려있는 렘브란트의 그림 원본, 영화 사운드오브뮤직(Sound of Music)의 촬영지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잘쯔부르그의 교회무덤, 체코에 있는 회교식 건물의 성당에서 종탑으로 올라가서 경치를 보는 것,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있는 아직도 짓고 있는 기괴한 동굴 같은 가족성당, 프랑스의 노틀담 사원의 유명한 조각품들 등등, 그런데 이 모든 교회를 한 번에 한방에 날려버린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바티칸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설계하고 건설했다는 바닥 돌을 밟으면서 들어간 그곳은 지금까지 본 교회를 한 번에 압도를 하였다. 더욱이 그곳에서 지하무덤에 유리 상자 안에 안치된 베드로의 관(베드로라고 추정한다)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경건함과 경배감이 우러나왔다. 수많은 교황과 성자의 무덤과 관이 교회 여기저기에 안치되어 있고 특히 걸어 다니는 바닥 대리석은 다빈치가 사람들이 왕래 시 닳는 정도까지 계산하여 설계한 것이라니 새삼 다빈치의 지혜에 감탄했다. 로마시내에 그런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단순한 광장인데 다빈치가 설계했다는 곳은 특별한 관심을 끌었다. 유럽 주요도시여행을 마칠 무렵 나는 서구인들의 국가 간 경쟁은 신 앞에 복종을 다짐하고 충성을 위한 문화로서 교회를 더 크고 더 높고 더 우아하게 지어놓은 모습을 목도하고 말았다. 말 그대로 기독교문화를 보고야 말았다 그것은 첫째로 교회의 건축물을 통하여 많은 예술이 발달하고(미술, 건축, 음악 등) 과학의 발달을 촉진시키도록 한 것 같다. 중세에 100-200m에 달하는 높이의 우아한 장식이 달린-그것도 돌로 정교하게 조각한 종탑을 어떻게 건축할까?, 어떻게 저렇게 높은 곳에 우아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붙였을까? 엄청나게 큰 풍금과 실내의 장식들, 큰 주춧돌과, 정교한 기둥 들... 교회 하나만 짓는데도 온갖 과학과 예술이 동원되었고 이것이 일상의 문화와 과학의 발달에 일조하게 되었을 법하다. 아무튼 교회를 너무 많이 봐서 교회를 보고서 ‘아 이 나라는 좀 강했던 나라, 저 나라는 약소국’ 이런 느낌까지 들 정도로 교회는 그 나라의 국력을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보이기까지 하였다. 교회도 많이 현대화된 것 같다. 내가 다녔던 영국의 성공회 교회도 거의 200년 정도 된 것 같은 오래된 건물인데 헌금은 온라인 자동입금이나 수표로 받는 게 일상화되어있는 것 같다. 교회의 웹사이트를 운영하거나 이메일을 신도들의 연락에 활용하고 그리고 교회신자에게 입교 시에는 온라인 헌금 정기 지불 양식을 주고 계좌번호를 적어내라고 해서 온라인으로 처리한다. 우리나라도 이렇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이러니 헌금을 소득에 맞추어 꼬박꼬박 낼 수밖에 없는데 나는 생활이 빈한한 유학생이라 거의헌금을 거르고 물론, 온라인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영국에서 가만히 보니 교회는 좀 먹고 사는 정도가 되어야 다닐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높은 물가고에 세금, 그리고 거기다 하늘나라 세금인 11조까지 내야하니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교회보다도 서구사회가 기독교 문명인 것은 아이들 역사시간의 내용을 보고는 더욱 확실해졌다. 초등학교 5학년 정도의 역사시간의 공부내용을 보니, 이집트문명부터 시작을 하고 있었다. 그 다음 그리스 로마를 거쳐 고대 로마가 정복한 영국의 역사를 시작한다. 고대문명의 역사시간에는 이집트에서는 무얼 먹고살았는지 글자를 어떻게 사용하고, 미이라를 만드는 방법, 피라미드를 짓는 방법 등을 자세히 사진과 그림을 곁들여서 가르친다. 이 역사공부는 바로 성경의 출애급기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초등학교부터 따로 종교시간이 있어서 온갖 종교를 배우지만 결국은 영국교회로 수렴하여 공립학교 조회시간에도 아직 찬송과 기도를 하고 있다. 물론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이를 원하지 않는 학생은 기도시간에 빠져도 된다. 이런 아이들은 보통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의 자녀들인데 이들은 대개 인도나 중동에서 온 아이들로 머리에 터반을 하고 다니기도 한다. 영국국교는 가톨릭에서 독립이후 독자적으로 약간의 의식의 변형을 하고 영국 내에서 중앙집권적인 통치조직을 가진 국교로 발전하여 아직도 비숍(주교)이라고 하여 교회 최고지도자가 있는데 영국 왕은 사실상 영국교회의 왕이기도 하다. 서구의 교회는 하나의 순례의 코스로서 가는 곳마다 시간을 가지고 명상에 잠기며 묵상과 기도로 여행을 하여도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훌륭한 곳이다. 충분한 시간이 없다면 이곳에 무엇이 유명한 것인가를 중심으로 감상하며 그보다 시간이 없다면 다만 규모와 건축적 미와 내부 장식의 예술적 기교를 비교하면서 감상하면 될 것 같다. 주말에는 이런 오래된 교회들은 아직 예배장소로 쓰여 지고 있으므로 참석해보는 것도 유용할 것 같다. 여행 시 교회를 여행객들이 반드시 들리는 것은 보통 교회는 입장료를 안 받고 자발적으로 내는 한두 푼의 동전들을 받으므로 비용이 안 들어서 관광객이 더 많은 것 같다.
[요크 성당]
영국에서 가본 곳 중에 인상 깊은 곳은 요크의 성당이 참으로 우아하고 정교한 장식과 특이한 천장의 장식을 보여주며, 솔즈베리 성당은 그 높이가 영국 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며, 에딘버러 시내 중앙의 한 교회는 종탑의 장식이 영국의 왕의 왕관모양을 한 우아하고 정교한 장식으로 돋보였다.
[요크성당의 챕터하우스 천장 장식]
내가 사는 도시, 엑시터 성당 역시 밤에 보는 조명은 정말 아름다운 성을 연상하게 하며 내부의 장식과 엄숙, 우아함도 다른 성당에 뒤지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영국의 교회를 보면 왕이 거주하는 성이나 귀족의 저택, 학교 등에는 꼭 교회가 딸려 있다는 점이다. 옥스퍼드를 방문하면 칼리지마다 아름다운 교회가 딸려있는데 여기가 학교인지 교회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교회규모가 크고 잘 꾸며 놓았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도 교회가 딸려 있었는데 본교 캠퍼스에 큰 교회가 하나, 그리고 내가 속한 교육대학의 세인트 루크(Saint Luke) 캠퍼스에 작은 교회가 하나 달려 있었는데 늘 경건하고도 아름다운 오르간 소리가 울리고 필요하면 공부를 하다가 기도를 하기도 하고 또 교회신자끼리 미팅하여 성경 토의 시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즉 영국의 교육과 관련된 문화는 정확히 성경을 따르고 있다. ‘너희는 지식의 근본을 이 말씀에서 찾으라’ 라고 한 성서의 구절처럼, 모든 교육기관들은 이처럼 채플을 귀하게 아름답게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옥스퍼드시내에 대학과 같이 있는 이 교회들은 멀리서 보면 옥스퍼드 시내를 전부 장식하고 있다. 이 뾰족한 종탑 들이 전부 대학의 교회들이다. 그런데 물론 케임브리지도 비슷한데 옥스퍼드처럼 규모가 장엄하고 그 수가 많지는 않다. 여기도 우리나라처럼 교인끼리는 모여서 기도회도 하고 끼리끼리 많이 모이고 친목을 도모한다. 교회의 토들러(Toddler) 그룹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린아이 보는 그룹을 지칭하는데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들이 쇼핑, 직업 등을 위해 서로 돌아가면서 아이 봐주기를 하는 게 대표적이고 그 외 야간에 성경공부, 주일학교 등이 우리나라와 유사한 것 같다. 교회생활을 통하여 잊혀지지 않는 것은 같은 교회 멤버인 데이비드 교수(내가 다니던 대학의 수학과 교수)가 크리스마스에 우리가족을 초대하여 성대하고 정성이 담긴 크리스마스 정찬을 대접하여 즐겼던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있다.
다른 한 가지 기억은 같은 교회 멤버인 이언 콜드햄(Iain Coldham) 교수(화학과)가 미국 프로리다 대학에 교환교수로 3개월 가면서 그 넓은 저택을 나에게 싼 값에 임대하여 주는 바람에 넓은 정원과 많은 방을 가진 집에 살아본 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집은 아이들이 타잔 놀이를 할 수 있도록 나무가 무성하고 나무 위에 집도 지어놓고, 정원 한 끝에는 사과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 가지에 그네를 메달아 아이들이 타고 놀았으며 그 나무 밑에는 겨울에도 다포딜이 한없이 솟아올라 하얗고 노란 꽃을 피워 장관이었는데, 그 집 잔디가 하도 넓어 축구골대가 있고 아이들이 축구경기를 할 정도였다. 심지어 작은 연못도 하나 있을 정도였다. 그 교수는 케임브리지에서 화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하고 이름처럼 좀 차가운 느낌을 주는 교수였는데 나보다 나이는 조금 어려 친구처럼 지냈다. 그런데 집이 크고 넓어 난방을 하기에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 겨울을 춥게 보낸 기억이 있다. 아이언 교수가 한번은 우리가족을 집으로 초대를 하여 일요일 교회예배 후 점심을 먹었는데, 통상 영국의 가정에서 먹는 일요일 점심이라면서 요리법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 음식이 영국에서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이 먹던 표준음식이 되었다. 둥글게 말아 실로 묶어놓은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오븐에 넣고 2-3시간 천천히 굽고 서너 가지의 야채를 스팀으로 찐 다음 뜨거운 물과 그레이비 가루를 섞어 그레이비 소스라는 이름의 갈색소스를 만들어 고기와 삶은 야채에 뿌려 먹으면서 레드와인을 곁들인 것이었다. 우리가족도 그들을 초대하여 우리나라 음식을 맛보여 주었는데 불고기, 잡채, 김치, 쌀밥을 대접하였는데, 그들은 불고기와 잡채를 가장 맛있게 먹었다. 우리는 멸치 볶음도 대접을 하였는데 콜드햄의 큰 아들 피터가 멸치를 하나 집어들고 “이것도 생선이예요(Is this fish?)” 라고 묻길래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다.
종교는 대체로 이 나라에서는 생활의 일부분인 것 같다. 초등학교에서부터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한 달 전부터는 각 학교에서는 학년별로 발표회를 하는데 대부분 그 주제가 예수의 탄생과 부활에 관한 것인데, 각 학년 전체가 참가하여 연극과 노래를 합하여 각각의 역할을 담당하여 연기를 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각 학년의 담임 교사의 지도아래 무대를 꾸미고 의상을 준비하고 대본을 만들어서 집에서 연습하고 노래를 연습하여 하루 발표회를 가진다. 이런 모습은 그들이 어린 시절부터 생활 속에 베어든 종교의 생활화이다. 대체로 영국인의 생활에서 도덕이나 에티켓은 종교를 가진 사람만큼이나 높고 그로 인하여 교회를 다녀야만 하는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늘 캐롤송 서비스가 있는데 각 학교에서 중심이 되어 캐롤 송 서비스 클럽이 조직되고 조회 때나 병원 등에서 축복의 노래를 들려줘야 한다고 여겨지는 곳에 가서 캐롤 송을 부른다. 이것은 연례행사로 이를 시작으로 크리스마스 휴가는 거의 한 달간 계속된다. 크리스마스를 영국인과 같이 직접 보내보지 못하여 그 내막은 잘 모르겠으나 영국 아줌마들이 푸념하는 것을 보면 대충 우리나라의 추석이나 설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아는 헬렌이라는 이혼녀는 크리스마스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람들은 집에 와인과 맥주 그리고 각종 술을 잔뜩 쇼핑해놓고, 터키(칠면조)를 구워서 크리스마스 아침정식(디너)을 든 다음 계속 마시고 먹고 밤새도록 파티를 벌여 놀고 춤추고 그리고 마시고 또 먹고...늘어지게 자고 그리고 또 먹고 마시고, 아 너무 지겨워...’ 그 많은 접시와 술병...
크리스마스 때만큼은 가족들이 한 곳으로 모인다. 즉 며칠간 파티를 해야 하므로 잠자리가 충분한 부모의 집이나 혹은 형제를 방문하여 같이 보낸다. 부모들은 돈을 털어 자녀와 손자의 선물을 정성을 들여 준비한다. 이 선물들은 모두 크리스마스 트리 아래에 산처럼 쌓아 두었다가 크리스마스 날 뜯어보며 크리스마스는 절정이 된다. 여든이 넘은 스키너(Skinner)라는 할머니는 자기 아들이 예순이 넘었는데 아직도 자기가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크리스마스를 보는 그들은 마음은 순수 그 자체다. 이것은 종교와는 그리 관련이 없는 우리나라 추석이나 설에 버금가는 정도의 명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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