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숨쉬는 나라, 영국 [11] 거석(巨石)과 써클(circle) 문화

2024. 10. 10. 10:45여행

11. 거석(巨石)과 써클(circle) 문화

 

영국하면 선사시대의 스톤헨지(Stonehenge)를 우선 연상하는데 그 모습은 가까이서 가 보는 것보다 A303 도로를 타고 운전하면서 1-2 Km 거리를 두고 약간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압권이다. 돌을 둥그렇게 만든 제사용, 혹은 예배용이라는 설이 있는 스톤헨지는 거석 써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잘 만들어진 것의 하나인데, 이런 서클모양의 거석 건축은 영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여기저기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이 원형(round) 거석문화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는 많은 철학적, 실용적, 경험적 연상과 질문을 던져 주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옛 문화도 즉 불교식 문화는 원형 문화에 속한다고 여겨진다. 원만구족 (圓滿具足)이라는 용어가 보여 주듯이 윤회한다는 회귀사상처럼, 그런데 영국의 원형문화는 실제 생활의 문화이다. 대부분의 한국이나 동양의 문화가 중국의 상형문자가 보여주는 사각문화인 것에 비하여 영국의 일반적 문화의 특성을 보자.

 

[영국 남부의 솔즈베리에 있는 세계적 거석유적인 스톤헨지]

 

첫째 말의 음색은 구르는 원형문화다. 이 영어의 사용 새는 잘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데, 부드럽고 어떤 때는 감미로운 속삭임과 음악 같은 생각이 든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부드럽고 잘 이어지는 문화가 아닐까? 그들은 늘 모르는 사람을 길에서 만나도 인사를 하고 지나간다. 한국인은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으로 지나가지만, 영국인은 늘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옷깃만 스쳐도 쏘리(sorry) 를 말하고..., 삶의 생태는 매우 마일드 하고 소프트터치하다. 날씨는 일년 내내 물론 북쪽은 춥지만 변차가 심하지 않은 마일드 (mild) 한 편이고 혹독한 추위는 없다. 중부 이남의 잉글랜드 지방은 구릉으로 되어있어 원만 구족한 평지와 완만한 구릉의 굴곡은 그대로 원형의 자연을 알려준다.

이러한 원형문화의 유래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으나 이것은 하나의 공동체 구성이나 사회조직의 네트웍이나 건축 일상에서 많이 발견한다. 먼저 단절이 없다는 것. 사각과 달리 원형은 어디서 각이 지거나 끊어지거나 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다. 오래 유지되는 왕조, 전통의 고수, 사회조직의 다각적 네트웍 형태-이점은 별도로 논의를 하여야 하지만, 하나의 도시를 보면 학교-교회-지역공동체-공공조직-사설조직-자원봉사-기금모금-등등이 네트웍을 이루고 있다. 모든 조직은 하나의 주목적을 위해 봉사하고 있지만 이 조직은 그 이외에도 다양한 다른 조직과 맞물려 서로 상호보완적인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대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건축의 형태도 원을 많이 사용한다. 대부분의 집은 창문이 불룩 튀어나온 반원형을 하고 있다. 이것은 영국 집의 특징인데, 요즈음의 신설주택은 효율성과 편리를 가미한 삼각이나 사각을 많이 사용하나 그래도 많은 일반 주택은 반원형 창을 가진 게 다수이다. 이런 건축은 사실상 많은 비용을 수반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는 미적으로나 실용적인 측면에서 유익한 것 같다.

원형문화는 또한 포괄성을 의미한다고도 보인다. 즉 원으로 싼 어떤 실체를 상상한다면.. 이 포괄성은 근대문명이후 형성된 것인지도 모르는데, 영국인은 다른 민족을 포용하는데 귀재인 것 같다. 예를 들어 교육기관이 많은 도시에 가면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이민족을 교육시키면서 그들의 제각기 다른 영어발음, 서툰 말을 거의 다 포용한다. 우리는 프랑스인이나 독일인이 영어를 쓰면 잘 알아듣자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영국 영어 강사는 아시아인 이건 유럽인이건 이를 잘 소화한다. 그들은 많은 영어 확산을 통하여 프랑스인은 어떤 발음에 특히 약하고, 동양인의 억양의 특징, 스페인인의 미흡한 영어 등을 구분하는데 이 부문은 특히 어학센터 등에서 잘 정립이 된 것 같다. 그런데 영국은 같은 유럽 중에서도 하나의 중심지이며 각지에서 몰려드는 곳으로 이를 포용하는 정책이 잘 정립이 된 것 같다. 이는 다른 사회조직과 맞물려 있는데, 예를 들어 UK-HOST같은 제도는 영국에 유학 온 학생이나 가족을 영국인이 초대하여 2일에서 일주일 정도 숙박시키면서 음식을 나누고 문화교류를 하도록 하는데 초대받는 측에서는 일체무료이다. 이는 인터넷으로 처리한다. 유학가시는 분들은 혹시 웹사이트에 찾아보면 영국의 가정을 이를 통하여 무료로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것이다. 인종문제에 관하여 물론 그들의 내적인 심리상태는 어떤지 잘 모르겠으나 흑인과 백인이 자유롭게 결혼을 하는 것을 보면 거의 차별이 없다고 보여 진다. TV뉴스 앵커도 흑인이 많고, 가수, 사회 유명인사도 흑인이 많다. 동양인보다 오히려 흑인이 영국인에게는 친근한 것 같다. 아니 흑인도 영국사회의 중요한 구성원의 일부다. 내가 살던 지역은 영국의 서남부 따뜻한 지역으로 처음에 와서 보니 흑인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흑인은 런던 등 대도시에서 돈벌이가 좋은 곳에 사는 것 같은데 표면상으로 보면 하층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버스차장이나 청소 등등. 이곳(엑시터)은 알려진 바로는 영국내의 중상류층이 은퇴 후 집을 사서 여생을 조용히 즐기면서 보내기 위하여 런던에서 많이 내려오는 곳이라고 하는데 거의 흑인은 찾아볼 수 없었고 노인층 아니면 대학을 중심한 학생인구가 대다수인데, 외곽으로 나가면 한적한 들이나 구릉지역에 아담한 집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사는 한가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들이 만년에 연금으로 생활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선 멀리 대서양 해변이나 바다를 보며 온갖 아름다운 꽃이 자라는 정원을 손질하며 조용히 산다. 원형문화는 구심점을 향하여 늘 동심원을 그리는 문화이다. 구심점엔 영국 왕이 있다. 현재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물론 실권은 없지만 수상보다도 더 막강한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 왕은 국민의 결속력으로 원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왕가의 일상은 국민의 연속극이며 생활의 일부이며 국민들은 이를 무척 사랑한다. 왕은 주요 행사에는 전국을 일주하며 그리고 영연방을 순회하며 자신을 서민 속에 보여주고 국민과 호흡을 같이한다. 나도 영국 왕 즉위 50주년 되는 해 여왕의 Golden Jubilee Travel(여왕의 지방순회여행) 이 있던 2002년에 바로 코앞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을 보며 그녀의 엑시터 시 방문을 환영한 적이 있는데, 근엄함과 서민다움을 같이 보여주고 있는 국민 속의 명실상부한 왕이었다. 왕은 바로 국민을 하나로 잡아끄는 구심점인데 최근에는 왕가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은 것 같으나 그것은 아주 급진적인 소수의 의견이라고 보인다. 최근의 신문에 가십은 왕가의 가족들이 선물로 받은 각종 물건을 런던의 상점에 팔아서 현금화하는 것이라든지, 왕실의 가족이 소유하는 각종 보석이나 물건을 서민도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는 것이라든지, 다이애나비의 비서였던 폴(Mr.Paul Burrell)이 다이애나 비 사후에 소장물품을 보유한 것에 대하여 절도죄로 재판이 열렸는데, 그 비서가 재판진행 중에 여왕에게 자기가 다이애나비의 물건을 보유하겠다고 여왕에게 보고했던 사실을 여왕이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재판이 무산된 것 등이 큰 이슈가 되었다.

 

[다이애나의 개인비서 폴 부렐*]

* 다이애나 사후 그녀의 속옷 등 유품을 6년간 소장하여 직권남용으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기각됨

 

영국의 이 원형의 포괄적 성격은 포용성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영국이 근대 제국을 형성하면서 많은 이질적 문명을 공유하게 된다. 런던은 인종전시장처럼 온갖 나라의 사람이 산다. 오히려 내가 살던 엑시터는 그야말로 영국 전통의 앵글로색슨족만이 모여 사는 조용한 도시로 보였다. 많은 서구의 학술적 교과서에, 예를 들어 사회조직론을 보면, 서구문명의 우월성을 공개적으로 기술하고 이는 더 나아가 앵글로색슨족의 우월성을 나타내는데, 이는 근대 산업사회를 계기로 아시아의 신흥공업국이 국가조직이나 경제조직 운영 면에서 우월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나타나면서 서구문명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없지는 않다. 물론 서구문명, 즉 핵심적으로 앵글로색슨족의 우월성은 객관적으로 모든 나라들이 그들의 사회조직과 산업 운영방식을 도입하고 모방하는 것을 보면 그 우월성이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문화 확산은 절대로 자기문명을 지나치게 강요하거나 규격화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식민지 운영과정에서 총독이 정치제도를 만들거나 사회 규범을 근대화하는데 그들의 제도를 이식한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데 그들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