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숨쉬는 나라, 영국 [7] 영국인의 한국에 대한 인식

사랑이 숨쉬는 나라, 영국 [7] 영국인의 한국에 대한 인식

2024. 10. 9. 23:25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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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국인의 한국에 대한 인식

 

<이 글은 2000-2003년도의 시간대에서 기술한 내용이며 지금은 상당히 많은 변화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영국은 한국과 수교를 한지 100년이 지난 지금 우의가 돈독하고 상호 우방국으로 여겨지고 있다.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데 대개 40대 이후는 한국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른다. 그들은 아시아인처럼 보이면 대뜸 중국에서 왔느냐고 묻는다. 대개 부모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사람의 자녀들 같으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쏟아준다.

 

[런던 한국전 참가자 행진, ‘08. 3> ]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아직도 모르고 있다. 그런데 시내의 쇼핑몰에 가면 한국 제품은 무지하게 많다. 그들은 한국보다는 대우, 삼성, 엘지 같은 제품에 대해서는 아는데 그 제품이 한국 브랜드라는 사실은 전혀 모른다. 그래서 느낀 점은 국가의 이미지도 중요하지만 기업의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대우차를 좋아한다. 싸고 날렵하고 작고 그들이 요구하는 사양은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2002년 대우가 GM으로 넘어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대우의 몰락을 걱정했다. 시내의 중고차 시장으로 대우차가 무지하게 많이 쏟아져 나왔다. 본사가 무너지면 부속의 공급과 A/S가 잘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사실이었다. 우리가 사는 시내의 대우 대리점이 문을 닫고 수 십 자리의 직업이 없어지고 부속가게에서 부속이 조달이 안 되고 하는 안타까운 사태가 도래하였다. 같이 유학하던 한국인 중 대우차를 가진 분들도 사고가 나서 차를 고치려 해도 부속을 구할 수 가 없어서 몇 달 째 그냥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대우의 몰락으로 엑시터의 대리점이 폐쇄되고 여기서 50마일 이상 떨어진 토키(Torquy)라는 곳에만 남서부의 대리점을 하나만 경영하게 되어 부속이나 정밀 차량 검사 및 정비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불편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글로벌 경제사회에서 우리나라 기업이 하나 무너지니 그 여파는 그 기업의 제품을 사용하는 영국의 시골의 고객에게까지 그 피해가 직접 미치는 사태를 목격하니 기업이 망하면 많은 고객을 같이 끌고 들어가므로 그 사회적 책임이 얼마나 큰지 여기서 목도를 하였다. 그리고 동시에 기업은 국제적으로 투명하고 책임을 다하는 기업이 되어야 그 기업을 통하여 국가의 이미지가 제고되므로 우리는 국내에서 기업의 운영에 있어서 세계경영이 가능하도록 국제적 수준의 건실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 대우가 한국제품이고 고객들이 대우의 몰락으로부터 이미 구입한 제품의 서비스를 받는데 불편을 받았다면 한국인이 하는 기업에 대하여 이미지를 구길 것이고 앞으로 아무리 좋은 다른 제품이 있더라도 이를 기피할 것이다.

그런데 영국에 살면서 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보면 정말 실망스럽기 그지없고 어느 때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BBC에서 가끔 한국 특집을 보여준다. 뉴스나 혹은 한국의 민주화나 노동운동 정도. 내가 우선 떠오르는 한국은 서울의 마천루와 복잡한 교통, 말쑥한 유행을 따르는 젊은이의 옷차림, 그리고 아름다운 금수강산. 그런데 정작 여기서 보는 한국의 모습은 경찰과 대치를 하는 시위대 모습, 시골의 농부가 소를 몰고 밭가는 모습과 시골 장에서 순대를 놓고 소주를 기울이며 시름을 달래고 있는 찡그린 얼굴의 서민들 모습. 그야말로 태국의 방콕보다도 활기와 희망이 없는 암울한 모습만 방영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더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국제 정치적으로 힘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데 이것은 영국인의 탓만은 아닌 것 같음을 나중에 느낀다. 영국은 18세기부터 중상주의를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세계를 지배한 전통을 가지고 있어 일단은 다른 국가나 민족을 대하는 데 있어서 영연방에 속하거나 속했던 국가에 우선적으로 우호적이다. 지금도 매년 전 세계 36개의 영연방 체육대회를 우리나라 전국체전대회 열 듯 여는데 이는 그야말로 소규모 올림픽이다. 여기의 기록은 거의 세계적 신기록이다. 물론 아프리카의 소국이나 동남아의 영국 식민지 국가이거나 과거 식민지였던 국가는 한마디로 카메라의 앵글이 잡힐 때 우호적으로, 환상적이고 아름답게 잡힌다. 한국은 구한말 열강의 침탈 전에서 영국은 사실상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며 그로 인하여 우리나라와의 깊은 인연은 사실상 멀어졌다고 보인다. 일단 자기식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한국이 TV 화면에 보일 때는 아프리카의 짐바브웨보다도 더 먼 아시아의 한 작은 국가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최근에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국민의 생활이 선진국에 접어들었다고 자부하고 있으나 이들은 전혀 그런 점을 인정해 주지 않으려 한다. 영국인의 한국에 대한 판단기준은 전통적 문화요소와 전반적인 국민의 생활의 질인 것 같다. 하나의 특별한 예는 국민의 생활매너가 특히 이들의 관심사인 것 같다. 특히 일본에 대하여는 꺼벅 죽는 것이 이들의 태도이다. 물론 일본은 영국인이 보아도 돈을 여유 있게 쓰고, 그러나 그보다 이들의 매너는 깨끗하다. 일본인은 일본에 가보면 참으로 매너가 깔끔하고 뒷마무리가 정갈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들의 문화적 역사적 오류와 비행이 문제가 아니라 현재 사는 삶의 행태가 얼마나 고객의 입장에서 얼마나 매력적이냐 인 것 같다. 일본은 이런 면에서 우리의 스승이다. 우리가 사실 일본과 문화교류의 물꼬를 튼 것은 이런 모습을 배우자는 것이지, 밑바닥의 3류의 원조교제 같은 수준 낮은 문화를 배우자는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 영국인은 매우 약삭빠르고 사실은 계산적이며 현실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본다. 즉 한국의 경제력이나 생활의 수준에 대하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 비하여 한국이 더 나은 나라라고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지도 모른다. 그것은 사실 맞다. 서울이 훨씬 큰 도시이고 엄청난 인구를 가진 런던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도시이지만, 런던의 어느 한 구석을 가보라. 예를 들어 영국 여왕이 중요행사시 참석하는 세인트 폴 성당을 한번 보자.

 

[런던, 세인트 폴 성당]

 

그 성당하나의 현물가치는 우리나라 서울시내의 최고층 빌딩 10개를 합쳐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도시 전체가 이런 기념물과 고전적 건물과 기념장소로 차 있다. 그러니 그런 의미에서 영국은 아직도 부자이고 비록 물가가 높고 세금이 많아 힘들어도 영국인들은 그냥 사는 것이다. 영국인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50%이상이 높은 물가고와 세금 때문에 이민을 가고 싶다고 대답을 하였는데, 나머지 그냥 살고 싶다고 대답한 사람들의 이유는 조상이 남긴 문화유산의 자랑스러움 때문이라나? 영국은 과거의 꿈속에서 가난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다. 영국은 작은 집 같은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고 지금 국제적인 문제에 대하여 미국이 내미는 손을 거부할 수 없는 정치적 입장에 놓여있다. 사실 영국은 전통적인 국제정치적 영향력으로 인하여 미국에 협력을 하지 않으면 미국은 엄청난 국제적 지지력을 잃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미국은 이제 사실 영국의 도움이 없이도 국제적으로 거칠 것이 없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영국내의 TV에서 영화프로를 보라. 70%이상이 헐리우드 판이다. 내가 처음 영국에 와서 TV를 틀었을 때 나는 고상한 고전적인 영국의 영상문화를 접하기를 바랬는데, 우리나라나 거기나 헐리우드의 융단 폭격에 거의 만성이 되어버린 것 같다. 미국은 영국이 주는 협력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반대급부로 주는지는 알 수 가 없다. 그러나 미운 동생에게 협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영국의 입장은 딱하기 그지없다. 영국 국민의 50% 이상은 높은 물가고, 세금 등으로 인하여 이민을 가고 싶어 한다. 국민이 부담한 높은 세금은 걸프전이나 아프칸 전쟁 등 국제적 위상과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으로 지불되고 국내정치나 사회생활, 재정수지는 악화된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현재의 국제적 분쟁지역에 영국이 개입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이런 측면에서 책임의식을 가질 만도 하다.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이스라엘이 정주하면서 팔레스타인과 분쟁을 일으킨 지역 등은 영국이 식민지 개척 시절 개입하거나 관계를 가졌던 곳이며 영국은 이 모든 지역에 대하여 알게 모르게 책임이 있다.

영국은 사실 가만히 뜯어보면 일본과 매우 닮았다. 우선 지리적으로 섬나라라는 점이 그렇고 근대문명의 태동기에 공격적 식민지 개척을 한 것이 그러하며 섬나라이므로 해적이 유명하다. 영국은 일본을 동경하는 나머지 아주 존경의 대상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일본을 배우자는 운동이 묵시적으로 머리 속에 있는 것 같다. 경제적으로 영국을 능가하는 나라에 대하여 영국은 머리를 과감히 숙이고 배우자고 한다. 솔직하고 현실적이다. 윈저성에 가서 보면 일본 천황이 영국을 방문한 사진이 있는데 일왕(日王)을 영어로 황제(imperial)라고 표현하여서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이는 제국주의 시절 쓰던 천황이나 황제 같은 의미인데 우리나라 같으면 인정을 못할 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에서는 일왕으로 대우받고 영국에 가서는 황제로 신분이 바뀌는데, 현대문명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런 것을 가지고 장난 같은 짓들을 하는 것을 보면 실소를 금치 못하나 이런 것을 받아주는 영국을 보면 관대하고 애교스럽다. 영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동차는 일본 혼다나 그와 비슷한 종류의 일제차를 최고로 친다. 물론 소니 같은 TV나 가전제품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일본기업이 일찍이 쌓은 명성과 제품의 질 때문에 영국인의 뇌리에 그 브랜드가 깊이 박혀있고 그러므로 그 제품들은 세계적인 명성을 유지한다. 왜냐, 영국인이 인정하는 제품이므로.

영국인은 물론 그들의 생활기준에 의하여 다른 문화를 판단한다. 예를 들어 월드컵 때 한국에 방문 시, 주의사항을 우스개 형식으로 방송에서 내보낸 것을 보고 한국인이 발끈 한 적이 있는데, “한국의 대도시를 걸어가려면 팔꿈치를 칼처럼 날카롭게 갈아서 다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행인의 어깨에 치여 다친다”. 라는 코멘트가 있었다. 이것은 영국인의 기준에 보면 맞는 말이다. 여기는 거의 절대로 남의 어깨를 치고 가는 일은 없다. 길을 걸어갈 때 영국인의 일상을 보면, 좁은 길에서 저쪽에서 걸어오는 부부를 만나면 혼자 걸어가던 사람은 길 한 켠 으로 그 부부가 방해받지 않도록 비켜서서 그들이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지나가는 부부는 기다라는 사람에게 탱큐라고 하면서 웃으면서 지나간다. 혼자 가는 사람은 저쪽에서 일행이 오면 좁은 길인 경우 비켜서서 양보를 한다. 물론 복잡한 대도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만. 이런 문화를 가진 사람이 한국의 명동이나 종로에서 남의 어깨를 툭툭 부딪치고 지나가는 사람의 무례함을 경험한 경우 얼마나 한국 사람을 경멸했겠는가? 우리도 길을 걸을 때 늘 앞에서 오는 사람을 주의 깊게 보아 길을 양보하거나, 길이 좁을 때는 잠시 기다리거나 하는 행동미덕을 길러야겠다. 아무리 바빠도 남의 어깨를 툭툭 치고 지나가지는 말자.

 

영국인은 동물을 사랑한다. 특히 개를 아주 사랑한다. 그러니 개고기를 먹는 문화를 얼마나 경멸했겠는가? 개를 기르면서 사람처럼 사진을 찍어 보관하고 죽으면 묻어서 기념하고... 이상하게 영국 개는 영국인처럼 예의가 바른 것 같다. 거의 절대로 사람을 물거나 짓지를 않는다(물론 예외도 있다). 이곳은 자세한 시스템은 알 수 가 없으나 개를 데려올 경우는 거의 필요한 예방 접종과 혈통을 기록한 칩을 목에 걸리고 적절히 훈련을 받은 개라야만 집에서 기를 수 있다. 영국 개는 퍽 이나 신사답다. 그런 분위기에 살아서 그런지 이방인을 보고는 절대 짖지 않고 주인의 명령에는 매우 잘 복종한다. 길거리에서 걷다가 앞쪽에서 오는 사람이 개를 끌고 오면 나는 두 사람이 지나길 수 있는 넓이의 공간을 비켜주었다. 한자리는 사람, 다른 한자리는 개가 지나갈 수 있도록. 엑시터 시에서 5마일 떨어진 한적한 마을인 브로드클라이스트(Broadclyst)에 에드문드(Edmund)라는 레이디와 테드(Ted) 라는 젠틀맨이 살고 있었다. 내가 엑시터 시의 사회복지서비스회사에서 주말에 짬을 내어 아르바이트를 할 때 그 두 집을 주말에 방문하여 시간에 맞추어 집밖에서 강아지와 15분간 산책하고 부티 나는 소고기나 닭 가슴살로 만든 개밥을 차려 주는 일이었다. 에드문드 부인의 개는 닭이나 소고기를 삶아서 살코기를 저며서 냉장고에 보관하다가 시간에 맟추어 한 그릇 씩 차려주고 테드 씨의 개에게는 생선을 익혀 살코기만 발라 주었다. 사람이 먹는 밥보다 더 비싼 개밥이다. 개 비스켓도 가끔 주는데 그것도 비싼 것부터 싼 것이 있는데 잡을 재우러 보낼 때 혹은 특별히 말을 잘 듣게 할 필요가 있을 시 비싼 쿠키로 유인한다. 그런데 최근 내가 사는 Exeter시의 어느 주택가에서 정원에 풀어놓은 개가 정원을 뛰쳐나와 길에서 노는 어린아이에게 달려들어 볼을 물어뜯어 버린 대형 사고를 저질렀다. 다친 아이는 볼과 입술이 찢겨지고 평생 흉한 모습을 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는데 이 개는 바로 경찰에게 체포되어 격리되었는데, 개는 역시 개인가?...

 

2002년도에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백인 추방령을 내렸다. 많은 백인 농장주들이 아프리카에서 쫒겨 나고 재산을 몰 수 당했다. 이것을 본 영국인은 격세지감을 느꼈을 것이다. 똑같은 땅을 가지고 백인과 흑인이 아프리카에서 농사를 지으면 백인이 나중에 월등하게 잘 살게 된다. 백인들은 효과적인 영농법을 구사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농사를 짓는다. 그런데 잘 살게 된 백인을 두고 흑인들은 백인이 흑인을 착취한 결과 흑인들은 늘 못 살게 되고 백인만 잘 살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짐바브웨에서는 백인을 강제로 몰아내고 모든 재산을 몰수하게 되었다. 젊고 혈기에 넘치는 젊은 영국 대학 강사들 중 일부는 현재의 영국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하여 개탄을 하고 있다고 한다. 왜 영국이 이따위로 되어 버렸는가하고 공개적으로 자국을 비난한다고 한다. 통계적으로 영국의 소득수준이 높지만 사는 환경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보면 2002년 겨울에 시작한 영국 소방수들의 근무시간은 주당 프랑스보다 3분의1이 적다. 그러나 소득은 3분의1이 높다. 표면상으로 프랑스보다 훨씬 소득수준이 높으나, 그 봉급(평균 20,000 파운드 정도: 한화 약 4,000만원) 에서 떼는 세금이 만만치 않다. 20-30%가 세금으로 공제가 되며, 개인들은 또한 주민세를 집의 가치에 비례하여 낸다. 내가 사는 집이 약 15만 파운드 정도였는데 주민세가 700파운드씩 1년에 두 번씩 나왔다(320만원). 그리고 보통의 소시민이 기본적으로 내는 기본생활비만 해도, TV세 년 120 파운드, 전기, 하수도, 가스, 수도세 등 년간 약 1,000파운드, 집세(월세는 평균 500-600파운드, 월세가 아니더라도 장기할부금융 (mortage)를 무는 경우 유사한 비용) 년 5000-6000파운드, 자동차보험 및 도로세 년 400파운드, 등등을 공제하면 20,000파운드를 받는 자의 연봉은 실제 8-9000파운드가 남는다. 월 700-800 파운드로 식비와 기타 용돈을 써야하는데, 남는 돈이 없다. 그래서 공무원이나 은행원, 소방수들도 정규근무를 마치고 생계를 위하여 다른 파트타임(시간제) 직업으로 쫒아가기에 바쁘고 부부들의 맞벌이가 다반사이다. 표면상 국민소득은 우리보다 두 배 이상이 되나 실제생활은 1파운드를 아껴야 살수 있는 환경이다. 2002년의 월드컵과 2003년의 1월부터 이라크문제와 북한 핵문제가 표면화되면서 사람들은 한국에 대하여 많이 알게 되었다. 내가 귀국할 시점인 2003년 2월말 친구들은 눈물을 흘리며 너를 북한이 핵을 가지고 위협하는 위험한 곳으로 보내기가 너무 괴롭다고 말하면서 위로를 보내 주었다. 그런데 나는 이들을 진정시키려 국내는 너무 평화롭다. 라고 하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독일은 동독을 도우면서 그야말로 세상이 떠들썩하도록 하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과는 민초들이 하나씩 둘씩 서독편이 되고 동독은 뿌리부터 무너지고 결국 베를린 장벽은 국민의 손에 의하여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나라는 북한에 지원을 하면서 너무 시끄럽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북한에 지원을 하면서 북한의 인민들이 이를 수용하여 천천히 아래서부터의 혁명을 가져오기를 기대하는데 남한 내의 국민적 합의나 한목소리를 못 내므로 인하여 도와주고도 북한으로부터 냉소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국내적 전략적 부재로 인하여 오히려 북한의 권력핵심부로부터 비난을 가져오기도 한다. 유럽 각국은 북한이 수교에 대하여 긍정적 의사를 표시 하자 마자 너도나도 다투어 북한에 대표부나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만약 이들 유럽 국가가 미국과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그의 정치적 노선에 동조한다면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럽은 이미 유럽공동체의 정책노선을 따르고 거기에 어떤 정치적 유대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투어 북한과 관계를 개선하려고 하고 북한과 관계를 맺고자 한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을 견제하고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냉전지대에서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그들은 남한의 이미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경제적 여건보다는 미개척지의 북한을 염두에 두고 장차 남한 같이 떠오를 지역으로 북한에서 경제적 정치적 입지를 선점하려는 의도가 강하다고 보인다. 만약 사람들이 나에게 한국의 통일이 시급하고 또 남한 정치에서 가장 긴요하고 간절한 것이 그것 아니냐고 물으면 물론 나는 표면적으로는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그렇게 쉽게 대답할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2002년 유럽 여행 중 독일을 3번이나 들락날락 여행하였다. 동독지역, 서독지역의 구분은 확연했다. 통일된 지 10년이 넘건만 아직도 국내의 도로인프라는 정말 형편없었다(‘90년10.3일 통일 되었으므로 2011년 현재 21년이 되는 셈이다). 동베를린지구에 가보면 차도 없고 썰렁하고 2차 대전 때 폭격으로 부서진 공장건물이 아직도 뼈대만 있는 곳이나, 할 일이 없어 팔짱을 끼고 텅 빈 주차장 도로 턱에 앉아있는 나이 든 노인 등....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물가(동독지역에서 쇼핑을 해보면 물건값이 반 혹은 3분지2 수준이다). 언제 균등해 질 것이냐? 내 눈으로는 요원하다. 적어도 50년 내지 100년은 지나야 두 지역 간의 차이가 해소 될 것 같다. 그동안 무수한 돈이 투입되어 차이를 줄이려고 노력할 것이고... 만약 우리나라가 통일이 된다고 할 경우 같은 전철을 밟을 텐데.. 아직도 동베를린 지구는 공사 중이다. 아직도 허물어야 할 건물이 무수하고 도로인프라 공사는 한 참 더 진행되어야 한다. 먼지는 풀풀 날아오르고 찰리 검문소는 박물관이 되어버렸지만 현실은 불균형해소를 위한 힘든 나날들만을 남겨놓았다.

 

[독일 찰리 검문소 1977년도 사진]

 

많은 유학생과 비즈니스맨들이 일하고 공부하러 영국을 찾아오지만 영국은 사실 이런 국제적 교류에 대하여 별로 특별한 노력을 하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있는 자원을 무심히 똑같이 제공한다. 그러나 앉아서 엄청난 무역외 수지를 올리는 셈인데, 이것은 언어의 힘과 그동안 축적한 문화적 영역의 소산이다. 내가 한국에서 배운 영어는 미국식 영어로 90년대 말까지 그것이 영어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영국영어는 미국영어와 상당히 틀리고 그리고 미국식 영어보다는 영국식 영어가 전 세계적으로 더 많이 사용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영어가 굉장한 자원인 셈이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이론을 가만히 보면 아주 오래되었고 또 대부분 한국의 대학에서 한번쯤 읽었고 들어보았던 전공이론인데 이런 것들이 되풀이된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론들을 어떻게 적절히 연구에 적용하느냐 왜 이런 이론이 탄생되었느냐 그리고 실제에서 현실에서 이 이론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어떤 가치를 주어야 하는가 하는 등등의 체험을 영어로 함으로써 비록 대학원생으로서 대학에서 배운 것을 되풀이 하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는 것 같다. 나도 정확히 내가 영국에서 공부하는데 대하여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번은 Potter라는 레이디가 나에게 묻고 나는 대답하였다.

 

“너희나라의 생활수준은 어떠냐?”

“국가의 경제규모나 물가수준은 영국과 비슷하다!”

“그러면 왜 여기 와서 공부하느냐? 무얼 배우는가? 너희 나라에는 대학이 없느냐?”

“있다!”

“그럼 왜 여기 (영국)와서 대학원을 다니는가?”

“여기서는 영어로 배우기 때문이다!”

 

사실은 많은 유학생이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우리나라 서울대학교 같은 곳은 사실은 적은 자원으로 다른 대학의 몇 곱절이나 되는 실적을 가져오는 대학이다. 그런데 세계의 학문의 생산능력은 소위 SCI 라고 하는 지수로 표현된 유명 저널 발표논문수라든지 아니면 논문 인용건수로 보는데 이런 세계적이라고 하는 범주에 들어가려면 논문이나 저널 발표를 100% 순수 영어로 유창하게 하여야 한다. 그런데 국내대학에서는 이런 것들을 할 기회가 매우 제한되고 설사 자기가 영어로 무얼 썼다고 하여도 검증 받기가 어렵다. 원어민이 아니므로. 나도 박사학위를 통과하기 전까지 4편의 논문을 영어로 써서 세계 각 국의 저널에 발표를 했는데, 한편을 제대로 쓰는데 6개월 이상이 걸렸다. 더욱이 내가 쓴 것들을 지도교수나 친구들과의 토론을 벌이고 수정하여 제출 하는 데는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리기가 보통이었다. 영어로 국제사회에 뛰어들기가 얼마나 힘든가? 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어려서 많이 영어를 쓰는 나라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만이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길이다. 영어는 현지에 살고, 결혼하고 애증에 속 썩이고, 사고도 치고 하면서 현지의 삶의 패턴을 몸으로 배워야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운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영어강의를 하라고 강요하는 대학이 늘어났다는 보도를 보는데, 사실은 힘든 이야기 일 것이다. 나는 많은 한국교수들을 우리 대학에서 만나 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안식년 등의 시간을 틈타서 객원교수나 방문교수의 신분으로 내가 다니던 대학에 1년 정도 적을 두고 머물면서 전문분야를 영어로 접근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영어로 강의를 좀.. 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앞서 말했듯이 영어로 강의는 원어민 처럼 살아보지 않은 바에는 매우 힘든 일이다. 특히 대부분의 중견교수들은 유학을 했더라도 나이 들어서 했고, 그러므로 언어의 발달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았을 게 뻔하고. 나도 학교의 세미나에서 그리고 영국 교육학회(BERA)에서 내 논문을 발표를 해야 했다. 20여 페이지의 논문을 20분 정도 발표를 하는데 2주간 준비를 해야 했는데 대개의 영국대학교는 발표를 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안내해준다. 그런데 발표(Presentation)와 강의(lecture)는 다른 것이다. 발표는 정보의 전달과 토론을 위한 것이 주목적이나 강의는 그보다 훨씬 복합적이다. 어느 한국인 교수 한 분이 한국에서 영어로 강의하는 것을 연습하였다고 한다. 학생들에게 영어로 한다는 것을 미리 안내하고 준비한 것은 원서 중 중요한 부분을 이리저리 오려내서 자료를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주로 읽어나가는 것이 고작이라고 불평을 하였다. 물론 학생이나 교수나 영어공부를 하게 되니 환영했다고는 하나, 보다 중요한 정책은 영어가 능숙한 분에게는 채용 시 우대를 하여 영어로 강의를 유도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영어가 잘 안되는 현직 교수에게 이것을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고 보인다. 영어를 쓰자는 것은 국제화를 위한 것이고, 말까지 영어로 하자는 것은 교육의 고객(즉 학생)을 외국에서 끌어오자는 것인데, 사실 우리나라에 유학 오는 학생이 얼마나 많겠는가? 호주나 영국 같은 나라는 교육에서 거두는 수지가 지출보다 20배 이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차적으로 우리는 교수들에게 영어를 쓰라고 강요하는 것 보다는 영어로 저널을 발표하도록 돕는 것 같은 지원 작업이 더 필요할 지도 모른다. 학교 내에 전문 번역지원 제도를 두고 각 학과의 우수한 논문을 영어화 시키는 작업이 더 시급한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구를 하더라도 세계가 이를 모르면 끝이다. 2002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일본의 한 중소기업인 교토의 시마즈 연구소 연구원인 다나까 고이치의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그는 자기 선임연구원과 같이 그 연구를 하였는데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사실 연구책임자인 그 선임연구원의 이름을 논문에 맨 앞에 써야하는데 선임 연구원은 영어에 워낙 자질이 없어 공동연구자 이름을 쓰면서 자기는 이름을 뒤에다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세계 학자들은 주로 논문의 맨 앞에 있는 다나까 고이치의 이름을 인용하므로 그가 노벨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그들의 논문을 영어화 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노벨상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영국에서는 영어를 좀 잘 못쓰더라도 영국인들이 워낙 편안하게 해주므로 힘들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은 영어를 배워야하는 외국인들에게 참 미안해하는 눈치다. 늘 학교나 동네에서 영어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주제가 되면 자기들 입장을 말한다. “내가 너희 나라에 가서 한국어를 배운다면 나도 당신처럼 유창하게 한국어를 못할 것이다. 네가 나처럼 영어를 유창하게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어가 나에게 모국어가 아니므로.”

 

영어를 조금이라도 더 잘 해보려고 어느 주말에 시간을 내어 미들랜드의 버밍햄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스트레퍼드-어폰-에이븐(Stratford-upon-Avon) 의 세익스피어(1564-1616) 생가를 방문하여 순례하듯이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 가보았다. 그 생가의 내부는 근래에 들어서 관광객을 위하여 인공적으로 조성한 흔적이 많은 것처럼 느껴졌으나 그래도 영어의 최고봉인 세익스피어의 삶의 흔적과 숨결을 느껴보았다는데 의의를 두었다. 그가 글을 쓰던 책상이 우리나라 초등학교 책상처럼 아주 조그마했던 기억이 난다. 닳은 바닥돌과 작은 응접실, 그의 작은 침실 등이 그대로 있어 흥미로웠다.

 

[세익스피어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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