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과 예절

한국인과 예절

2024. 9. 12. 08:11단상(모노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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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s, courtesy)

 

예의 의미

 

()라는 한자를 풀어보면 보일 시(), 굽을 곡(), 콩 두(, 제기 祭器: 제사에 쓰는 그릇, 제수祭需: 제사에 드는 여러 가지 재료)로 분해되며, 이 의미는 제사상에 머리를 숙이는 것을 보여준다. 즉 영어로 manners, courtesy, (formal) the proprieties(처세술, 예절)의 의미를 가진다. 에가 언급된 유교의 5(.....)에서 예를 살펴보면 어질 인()

 

통치자의 최고 덕목이며 너그럽다. 마음이 너그럽고 착하며 슬기롭고 덕목이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러한 제왕의 지덕인 인의 근본은 극기복례라고 공자는 말했으며 인의 근본은 즉 자신의 욕망을 누르고 자기를 극복해서 예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였다.

 

: 이길 극

: 몸 기

: 돌아올 복

: 예도 예,

 

(자기의 욕망과 감정을 이겨내고 사회적 법칙인 예를 따르다.)

한편 공자는 예()의 근본(根本)을 겸손(謙遜)히 마다하며 받지 않거나 남에게 양보(讓步)하는 마음이라고 하였다. 현대적인 의미의 예는 일관된 합리적인 전제하에 이성적 인간의 규범아래 같은 의미를 가지지만 때때로 사례별로 조금 변형하여 고려할 수 있으나 조직원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영향을 미칠수 있는 리더십의 견지에서 본다면 공자가 의미한 원뜻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리더십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견지에서 동양의 유교적 전통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가치는 예라고 하는 겸손과 양보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반대는 교만과 거만인데 지위고하를 막론하하고 교만하고 거만한 인사가 바람직한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그 이유는 리더가 다른 사람의 호응을 얻기 어렵고 결국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2.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중국인들이 예로부터 우리나라를 예의 밝은 민족의 나라라고 평했다는 데 근거한 말이라고 한다.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해 뜨는 동방의 예의지국 또는 군자국(君子國)으로 일컬어 왔다. 중국의 공자도 자기의 평생소원이 뗏목이라도 타고 조선에 가서 예의를 배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우리의 민족성을 가리켜 어진 사람”(仁人)이니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아니한다”(好讓不爭) 혹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아 문을 잠그는 법이 없으며, 여자들은 정숙하고 믿음이 두터우며 음란하지 않다.”고 하여 칭찬해 마지않았다(교육학용어사전. (1995).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

우리나라의 대명사인 東方禮儀之國이란 말이 약 2300년 전에 중국의 학자 공빈(孔斌)이 쓴 東夷列傳에 처음으로 보이고, 그것은 우리가 중국을 대국으로 섬긴지 1000년 전이라고 전해진다. 그 동이열전의 해당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먼 옛날부터 동쪽에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를 동이라 한다." 그러니까 동이는 중국의 동쪽에 있는 나라이고, 동이열전은 '동이에 관한 이야기들'이란 뜻이다. "그 땅에 단군이라 하는 훌륭한 사람이 나니까 아홉개 부족 九夷가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뫼시니 중국의 요 임금과 한 때의 일이다."

 

단군이 임금노릇을 한 나라가 동이니까 동이는 우리 한국이고, 동이열전은 '한국에 관한 이야기들'이란 뜻이다. 그리고 중국의 임금이 요임금 때인 4300여년 전에 한국의 임금은 단군이었다는 말이다. 이런 기록은 동이열전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중국의 역사책에는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심지어는 '요임금 25년 무진년이 단군기원 1년이라고 연대까지 못 박은 기록도 있다. 2300년 전의 기록이니까 서양의 '예수'가 탄생하기 3백여년 전의 기록이다(우리예절, 화원선생어록-우리가 왜 동방예의지국인지 아십니까?).

급진주의적 논객들은 동방예의지국에 대해 중국이 변방에 있는 제후국들이 중국을 받드는 예를 차리기 위해 갖춘 덕목으로 본다. 즉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비굴한 격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중화사상을 가진 중국인이 오만한 모습을 보인 것이지 결코 비굴한 것은 아니다. 조선의 당파 논쟁을 보면 예에 관하여 심각한 논쟁을 벌이는 것이 나온다.

16세기 후반부터는 왕실의 종통 (宗統) 관련 전례(典禮)나 왕위 계승 문제에서 활발한 논의가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17세기에는 그것이 대대적인 정치 분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중국의 '동이열전(東夷列傳)''동방예의군자지국(東方禮義君子之國)'에서 유래한 말이다. 공자가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우리나라가 예의에 있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으뜸인 것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예의 우수한 칭호을 가진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다음 뉴스는 오마이뉴스 (2011.10.31. 임윤수 기자(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

A0001648289(2020.1.16.). 기사이다. 이 기자는 김우현(2011) 주자학, 조선, 한국도서출판 한울. 의 내용을 들어 동방예의지국에 대해 비판한다.

 

류큐는 1372년부터 중국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는데, 예의를 잘 지키는 나라라는 뜻으로 '수례지방'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중국 왕조들은 전통적으로 중화사상에 순응하는 국가들에 ''가 포함된 칭호를 내렸던 것이다. 이처럼 복종을 잘한다는 뜻으로 '하사'한 이름인 '동방예의지국'을 조선은 자랑스럽게 여겼다. 한국에서는 이 말이 나온 지 20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자랑스러운 뜻으로 여겨 자주 언급하고 있다."( 김우현(2011.67) 주자학, 조선, 한국도서출판 한울.)

 

"민족주의에는 국가와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고 발전시켜 외국과의 경쟁에 대비하여 미래지향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의 민족주의는 아무런 대비 없이 지내다가 굴욕과 침략을 받고서야 가해자와 침략자를 원망하는 저항 민주주의보다 더 수동적인 '왜 때려' 민족주의다(김우현(2011, 99) 주자학, 조선, 한국도서출판 한울.)."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동방예의지국', 비록 경제적으로는 조금 뒤떨어지더라도 경제선진국과의 비교에서 사회적 가치의 우월감으로 떳떳하게 말하곤 하던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이 이토록 수치스런 역사의 잔재물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얼굴이 후끈거립니다.

 

부하 국가가 되어 아무런 자존 없이 아부를 떨듯이 받치는 조공의 대가로 받은 '동방예의지국'은 결국 양반들이 백성을 등쳐먹던 수탈의 역사, 10승지라는 미명으로 피난갈 곳을 미리 정해 놓을 정도로 무능한 나라, 양반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병역이 면제 되던 몰염치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이런 '동방예의지국'이 작금의 정치에서는 그 대상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바뀌고, 외교를 가장한 또 다른 형태의 조공으로 우방국이니 동맹이니 하는 표현으로 현대판 '동방예의지국'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가 걱정됩니다.

중국의 왕조가 바뀐 이유는 한국을 먹으려다가 먹지 못하고 자신들이 망한 에를 보여준다. 수나라, 당나라 등이 그랬고 명나라는 조선이 정벌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독하다. 한국은 땅이 작아 중국에 사대 외교를 하였지만 중국이 땅만 컸지 한국을 마음대로 하도록 두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의 민족과 한국과의 관계는 아주 모호하다. 한국인은 몽골인종을 바탕으로 그 조상들이 러시아 바이칼에서 중국대륙, 심지어 알라스카를 지나 미국 인디언에까지 미치는 범세계적인 분포를 보여준다. 현재의 한족이 중국을 형성하기 전에 중앙아시아를 지배했고 한족에게 한자문명을 배우도록 한자를 만들었다. 한국민족은 강한 자 앞에서는 더욱 강하고 약자에게는 절대로 폄하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세계4대 강국인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인에 이야기 할 때 미국놈, 중국놈, 소련놈, 일본놈 이라고 놈자를 붙여서 기를 꺾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절대로 약소국에 대해서는 놈자를 붙이지 않고 존중을 한다.

세상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한 곳이고 인간은 신이 창조한 최고도로 정밀한 예술품이다. 신은 인간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살기를 원하지 폭력과 정벌과 살육을 하면서 설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관계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예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공자도 유교의 근본개념인 인에 대하여 다은과 같이 말한다. 인의 근본은 예다.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이 말을 보면 중국이 제후국에게 예를 하사한 것만은 아니다. 예를 바로 자신들도 지켜야 했던 죄고 덕목인 것이다. 예는 어질 인의 바탕에 깔린 유교의 근본적인 철학이자 개념이다. 그리고 중국은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제후에게 하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했을지 모르지만 한국은 그 근본개념을 생활 속에 비밀스럽게 실천하여 인간관계를 넓히고 친구를 많이 만들어가는 국가이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의 여권파워는 일본과 싱가포르(공동1)의 뒤를 이은 2이라고 한다. 이 순위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 비자가 필요하지 않은 나라의 수를 기준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한국은 비자 없이 방문이 가능한 국가의 수가 188개로 독일과 같이 공동2위라고 한다. 이 원천은 물론 한국이 가진 예에 관한 문화의 덕택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여권을 가지고 있으면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가 70여개국가 밖에 안 된다. 188개 국가를 갈 수 있는 나라인 한국의 문화적 정신적 영역이 더 넓은 것 아닌가? 앞으로 통신혁명과 AI 혁명이 일어나는 시대에 땅 크기가 국력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창의적 아이디어, 공감하는 문화, 좋은 규범, 헌신, 기여, 사랑과 같은 이타적이고 복지를 나누어 공유하는 힘이 더 큰 나라가 더 큰 국가가 될 것이다.

 

3. 군자국

산해경, 군자국은 의관에 검()을 찬다.’고 하였는데, 현재 고조선 강역에서 광범위하게 출토되는 비파형동검은 당시 고조선 조정의 고위 관리들이 차고 다니던 검으로 추정된다. 또한 한국의 고분벽화에 그려진 태양 속 삼족오(三足烏)와 설날 세시풍속인 도부(桃符) 등은 해 뜨는 동방 숭배사상의 전형으로 비파형동검과 함께 상고시대 동이족 고유의 대표적인 유물이 된다. 또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국화가 무궁화라고 알려지고 있으나, 그 전거가 되는 훈화초(薰華草)는 무궁화가 아니라 신선세계인 동방의 군자국에서 자라는 향기 나는 풀을 가리킨다.

 

군자국이 그 북쪽에 있는데 의관에 검을 차고, 짐승을 잡아먹으며, 두 가지 무늬가 있는 호랑이를 곁에 두고 부린다. 그 사람들은 사양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다. 훈화초(薰華草)가 있는데 아침에 나서 저녁에 죽는다.

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劒 食獸 使二文虎在旁 其人 好讓不爭. 有薰華草 朝生夕死

산해경(山海經)9 海外東經.

 

동방의 기운은 어질어서 / 東方氣仁

나라에 군자국이 있다 / 國有君子

훈화초를 먹으며 / 薰華是食

독수리와 호랑이를 부린다. / 雕虎是使

본디 예를 지켜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 雅好禮讓

예의는 논리에 따른다. / 禮委論理

곽박(郭璞)산해경찬(山海經讃)

 

단군정신선양회장·전 대종교 총전교 원영진은 다음과 같이 매일종교신문에 칼럼을 썼다(http://www.dailywrn.com/11521(2020.1.28.검색).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는 아름다운 이상 국가 군자국(君子國)이 있었다.

노인은 영가하고 아이는 춤을 추고 힘은 세고 강해도 순하여 예절이 바르고 다투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길가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고 대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그래서 공자도 군자들이 사는 나라로 칭송했다. 예의 바르고 정직하여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으로 태평성대를 누렸다. 서양에서는 유토피아 ou-toppos그리스 어원으로 없는 장소 즉 없는 곳(no place)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곳을 꿈으로 이상하며 상상하는 공동체가 유토피아였다. 그들은 실제는 이루지 못하여 이 세상에 없는 곳을 꿈꾸어 왔다. 현실의 부족함과 결핍된 곳에서 완전하고 이상적인 꿈을 그려왔다. () 유토피아 논자들은 없는 곳을 꿈꾼다는 점에서 유토피아를 몽상주의로 비하하기도 했다. 유럽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과 영국교회 설립으로 살육과 배신으로 휘몰아치던 16세기 토마스 모어가 쓴 국가의 최선의 정치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가공인물 유트로에우스가 신세계에서 보고 들은 가공의 나라들을 상상했다. 당시 유럽사회를 비판하며 이상형의 대명사가 되었고 유토피아 문학의 장르를 창시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토마스 모어는 반역죄로 참수를 당하면서도 희망을 노래했다. 결국 모어는 사후 교황청으로부터 성인으로 추대됐다. 우리 조상들은 군자국으로 빛나던 아름다운 역사가 있다. 단군왕검 17년 갑신년에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며 우순풍조하여 무병장수하며 산에는 도적이 없고 집에는 남은 곡식이 쌓여 밤에도 문을 닫지 아니하고 길에 흘린 것을 줍지 아니하며 노인은 노래하고 아이는 춤추더라! 사람마다 임금에 충성하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두터워 집집마다 천단(天壇)을 쌓아 한얼 제사하는 태평을 노래했다.

단군시대 태평성대의 모습이었다.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화평하여 무병장수하니 춤추고 노래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이화(理化)세계(世界)를 실현하며 천년 영광을 노래했다. 이것이 동방의 예의지국이었고 그 나라 사람들이 군자(君子)들 이었다. 나라 임금도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군자의 임금으로 나라의 치화(治化)를 맡겼다. 세계종교의 성자들은 이상적 세계를 꿈꾸며 믿음을 심었다. 예수는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 지상의 천국을 외쳤다. 석가도 죄가 없는 극락세계를 원하며 진법(眞法)을 전했다. 단군한배검도 자기 자신의 머리골의 천궁(天宮)과 나라의 천궁과 한울나라의 천궁(天宮)을 이루라고 말씀하셨다. 인류의 과학문명은 결국 인간의 이상적세계 행복을 여는 풍요한 환경을 조성함이다. 그 위에 풍요한 본심의 세계 마음의 평화 즉 천국을 이룸이다. 나철선생이 꿈같이 전한다. 하느님께 호소하여 천국(天國)을 새로 열어 한 나라 하느님교로 큰 지구를 통찰케 대소강약 너와 나를 한집에 일체애합 한 세계 한 도() 빛에 한얼 백성이 즐기고 만만대대 축복을..... 우리 군자국의 유토피아이다.

(단군정신선양회장·전 대종교 총전교)

 

4. 효도

 

한국에서는 효는 백행의 근본이다 라고 어려서부터 가르쳐왔다.

한국인의 삶과 죽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효도이다. 어른을 공대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또한 연상이나 상사에게는 절제나 삼가는 행위를 통하여 묵시적인 예를 표한다. 예를 들어 흡연을 하면 연장자에게 직접 대면하고 흡연을 하지 않는다. 부모 앞에서 혹은 부모와 같이 흡연하는 것은 아주 불경한 행실로 여긴다. 술잔을 받을 때 두 손으로 받거나 술을 마실 때 고개를 돌려 연장자의 면전에서 바로 들이키지 않는다. 선배나 상급자를 조심해 하는 행동으로 눈을 내리까는 행동이 있다. 그래서 후배를 혼낼 때 후배가 선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아주 버룻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 서양에서는 상대에게 말을 할 때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해야 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가족이 식사할 때 집안의 가장 어른이 수저를 들어야 나머지 식구들이 따라서 식사를 시작한다. 또한 상위에 차려진 음식도 맛있는 메인 요리 같은 경우에는 어른이 먼저 한 점 발라먹어야 가족들이 뒤이어 먹는 것으로 가르쳤다. 무엇을 하든지 어른이 우선이고 자녀들은 뒷 순위였다. 지하철을 타도 경로석이 따로 있고 심지어 임산부용 좌석도 따로 지정되어 있다.

부모의 생신도 챙기지만 60세에는 회갑이라는 연화가 있다.

효도의 개념은 먼저 부모가 준 몸인 자신을 잘 챙기는 것에서 시작한다.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라는 뜻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으로 여겼다.효경(孝經)에 실린 공자의 가르침이다.

몸 신

몸 체

머리털 발

살갗 부

받을 수

갈 지

아비 부

어미 모

 

공자가 집에 머물러 있을 때, 증자가 시중을 들고 있었다. 공자가 증자에게 "선왕께서 지극한 덕과 요령 있는 방법으로 천하의 백성들을 따르게 하고 화목하게 살도록 하여 위 아래가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셨는데, 네가 그것을 알고 있느냐?"라고 물었다. 증자는 공손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불민한 제가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공자는 "무릇 효란 덕의 근본이요, 가르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내 너에게 일러 줄테니 다시 앉거라.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날림으로써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끝이다. 무릇 효는 부모를 섬기는 데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는 과정을 거쳐 몸을 세우는 데서 끝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이야기는 효경의 첫장인 개종명의(開宗明義)장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신체발부수지부모라고만 하여도 뒷 구절인 '불감훼상, 효지시야'와 연결되어,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소중히 여겨 함부로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바로 효도의 시작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그리고 부모가 돌아가시면 근대이전에는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살이는 부모가 사망했을 때, 자식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거주하면서 탈상할 때까지 묘소를 돌보는 일을 말한다. 시묘살이는 유학의 유행과 함께 널리 실행되었다. 유학은 효를 지상으로 하는 이념이므로, 유학자는 돌아가신 부모를 3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모셔야만 했다. 그 때문에, 시묘살이 중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는 경우가 많으며 심하면 생명을 잃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묘살이는 유가의 보편적인 예서인 가례家禮등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시묘살이가 사대부가에 유행하게 된 것은 옛날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서 한 일이 중국에서 계승되었고,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사대부가의 풍속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시묘살이는 의례의 실천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유교적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시묘살이는 부모가 돌아가셨지만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생전에 못다 한 효도를 지속한다는 의미가 있다. 시묘살이는 국가의 법에는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의례행위라기보다는 사대부의 삶 속에 자리 잡은 전통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기록에는 고려시대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918~1910) 시묘살이가 시행되었다. 보통 2년에서 많게는 6년에 걸쳐 시묘 살이를 하였다. 이것은 개인과 가장 가까운 부모에 대한 지극한 예의였다. 시묘살이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실천하는 하나의 관습이었다. 그 외에 돌아가신 분을 위하여 제사를 올렸다. 제사는 유교적 방식에 따라 경건하고 거룩하게 모셨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십계명의 유일신 개념에 반대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제사는 추모기도로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제삿날만큼 한국 사람들이 직장을 빠지더라도 철저하게 지키는 행사는 없다. 죽어서도 같이 살아가고 지켜준다는 조상존중의 정신이 살아있다. 풍수도 매우 중시한다. 풍수도 과학적 근거가 있다. 돌아가신 분과 후손은 같은 DNA를 가지고 있어 서로 공명한다. 작고한 분이 습기가 많고 물이 흘러 유골이 홀대를 당하는 경우 자손에게 화가 미친다고 믿는다. 실제로 풍수에서 일이 잘 안 풀리는 집안의 산소를 파보면 유골이 지하수에 빠져있거나 습기를 머금어 유골이 예쁘게 산화되지 않고 검은 때가 끼거나 보기에 흉하다고 한다. 가계의 DNA는 죽거나 살거나 서로 공명하면서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자신의 몸 관리부터 조상의 제사에 이르기까지 삶의 방식의 하나인 예는 6000년 이전 단군시대에도 있었지만 조신시대 유교문화정치에서 극대화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는 공자를 핵심으로 한 유교적 문화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사서삼경에 나오는 효도를 기반으로 한 수신의 제반 규례를 철저히 지킨나라는 한국 뿐 이었다. 인간관계는 물론 인간의 일로 얽혀있지만 고도의 승화된 절제미가 있었다. 부부가 유별한데 한쪽이 죽으면 부녀자는 독신으로 정절을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하였다. 물론 이것은 근대 페미니즘 적 식으로보면 말도 안 되지만 불과 수 백년 전 까지 그런 관습을 유지했다. 2010년대에는 한국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집단적으로 내려 보는 패미니즘이 유행한 경향을 보였는데 그로 인하여 남성 측의 반발로 폭행도 있었다.

그런 영향은 한마디로 말하면 1980년대까지 유교적 관습에 억눌려있던 여성들이 1990년 이후 개방적 문화가 만연되면서 사회 각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나아가 남성위주의 사회에 도전장을 던지게 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동안 유교문화에 억눌린 여성의 실체가 풀린 것이다. 2020 현재 여성은 군대도 자원해서 가고 장교도 있으며 국회의원이나 장관직을 수행하는 고위직 여성들이 많아졌으며 국가고시도 여성의 합격률이 50% 이상이며 심지어 고등학생이 올림픽에 버금하는 세계대회에서 5관왕을 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지금은 여성상위 시대가 되었다. 가정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5. 복식 의례

 

조선시대의 복식은 동방의 예의지국답게 매우 복잡다단한 제관복식 규정을 가지고 있었다. 국왕을 비롯한 관료들의 복식은 제례복, 조복, 상복, 융복 등다양한 종류가 있다. 제사에서 사용한 복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조선시대에 국가 제사는 예치(禮治)를 표방하였던 통치권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그런데 제사는 일종의 의식행위였기 때문에 그 준비와 의식 절차 등이 매우 세심하게 고려되었다. 그것은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과정과 내용이었으며, 그러한 사실은 제관의 복식에서도 드러난다.

국왕을 비롯한 관료들의 복식은 다양한 종류가 있다. 제례복(祭禮服), 조복(朝服), 상복(常服), 융복(戎服) 등이 그것이다. 종묘의 제사에서는 당연히 제복을 착용하는데, 국왕과 왕세자는 면복을, 문무관은 제복을 각각 착용하였다. 다만, 국왕을 호위하는 무관의 경우에는 융복을 착용하였다.

조선시대 종묘제사에 사용한 면복을 비롯한 제복은 고려 말인 공민왕 19(1370)에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처음으로 명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을 사용하였다.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후에도 이것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태종 6(1506)에 명에 요청하여 제기, 악기 등과 함께 다시 하사받았다. 이후에도 제복은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것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명에서 하사한 것을 그대로 쓰다가 제복을 낡으면 다시 명에 요청하여 받는 방식을 취하였다. 다만 대한제국이 설립된 후에는 면복이 제후의 격이 아닌 황제의 격에 맞는 것을 착용해야 했기 때문에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 황제의 면복을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제복은 대략 관()과 복(), 그리고 규[, 또는 홀()]의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왕과 왕세자, 문무관, 호위무관 모두 동일한데, 다만 그 지위에 따라 내용상 일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국왕이 친제시를 하는 경우 국왕은 원유관(遠遊冠)에 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궁궐을 나와 재궁(齋宮)으로 들어간다. 의식이 시작되기 직전에 면복(冕服)을 갖추고 재궁을 나와 제사에 참여한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다시 재궁에 들어가서 원유관에 강사포를 갖추고 궁궐로 돌아온다. 왕세자의 경우는 면복을 갖추고 나간다. 제사에 제관으로 참여하는 문무관은 제복(祭服)을 입고, 호위무관은 기복(器服)을 입는다. 기복은 융복(戎服)이라고도 한다.

섭행시에는 문관은 국왕이 직접 제사를 지내는 친제와 같이 문관은 제복(祭服)을 입고 제사에 참여한다. 그 외에 국왕이 평시에 입는 복식의 내용과 규정도 매우 복잡하여 글로 다 쓸 수 없을 정도인데 지구상 그 어떤 나라도 이런 복잡한 복식 규정을 가진 나라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머리에 쓰는 면류관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면류관>

왕의 정복인 곤복(袞服)에 갖추어 쓴 의식상의 모자[禮帽]를 말한다. 예모 가운데 가장 존엄한 것으로서 겉은 검은색이고 속은 붉은색이다. 모자 위에 직사각형의 큰 판이 있는데 이것을 연()이라 한다. 모자의 뒤쪽은 올라가고 앞쪽은 내려왔으며, 뒷부분은 모지고 앞부분은 둥글다. 연의 앞뒤에 구슬을 꿰어 매단 것이 있는데, 이것을 유()라고 한다. 유에는 구슬 12개를 꿰어다는데, 구슬 줄을 연의 앞뒤에 최고 12줄까지 늘인다. 유의 수는 지위에 따라 그 수가 달라지는데, 천자가 12, 제후는 9, 상대부는 7, 하대부는 5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송대(宋代) 이후부터 상대부 이하는 유를 사용하지 않았다. '국조오례의' 서례 제복도설의 면류관 면판冕版, 평천판(平天版)의 너비는 8, 길이는 16촌으로서 앞은 둥글고 뒤는 네모났으며, 겉은 현색증(玄色繒)으로 덮고 안은 훈색증(纁色繒)으로 쌌다. 그리고 각, 관신(冠身)을 말함의 앞 높이는 85, 뒤 높이는 95푼으로서 면류관의 특징인 앞이 뒤보다 1촌 숙었으며 금으로 장식하였다. 그리하여 면판과 관신은 옥항[玉桁, 또는 옥형(玉衡)이라 함]으로 연결하였고, 금잠도(金簪導)를 꽂았다. 면류(冕旒)는 제후국을 기준으로 9류로 구성되어, .뒤를 합하면 모두 18류였다. 매류에는 9개의 옥이 있어 주().().().().()5채옥(采玉)........의 차례로 꿰었는데, 류의 길이는 9촌이었다. 이러한 체제는 고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바뀌게 되었다. 즉 광무(光武) 원년(1897)에 대한제국이 설립되자 황제국 체제에 맞추어 12류관이 되었다. '대한예전' 제복도설에 의하면, 면제(冕制)는 원광(圓匡)의 오사모(烏紗帽)로서 관() 위에는 복판(覆版, 평천판(平天版))이 있어 주척(周尺)으로 길이 24, 너비 22촌이었으며, 겉은 현색(玄色), 안은 주색(朱色)이었고, 앞은 둥글고 네모졌으며 앞.뒤에는 황().().().().().().()의 일곱 가지 색깔의 옥주(玉珠)를 꿴 12류가 있었다. 그리고 평천판(平天版)과 관신(冠身)을 연결 유지시키는 옥형(玉衡)이 있었고, 옥잠도(玉簪導)를 꽂았다고 기록되어 있다(http://culturecontent.com/content/(2020.2.4.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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