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묘살이와 한국인

시묘살이와 한국인

2024. 9. 25. 08:31단상(모노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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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묘살이와 한국인

 

한국인의 삶과 죽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 어른을 공대하고 부모에게는 효도하고 또한 연상이나 상사에게는 절제나 삼가는 행위를 통하여 묵시적인 예를 표한다. 예를 들어 흡연을 하면 연장자에게 직접 대면하고 흡연을 하지 않는다. 부모 앞에서 혹은 부모와 같이 흡연하는 것은 아주 불경한 행실로 여긴다. 술잔을 받을 때 두 손으로 받거나 술을 마실 때 고개를 돌려 연장자의 면전에서 바로 들이키지 않는다. 선배나 상급자를 조심해 하는 행동으로 눈을 내리까는 행동이 있다. 그래서 후배를 혼낼 때 후배가 선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아주 버룻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 서양에서는 상대에게 말을 할 때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해야 하는 것과 정반대이다. 가족이 식사할 때 집안의 가장 어른이 수저를 들어야 나머지 식구들이 따라서 식사를 시작한다. 또한 상위에 차려진 음식도 맛있는 메인 요리 같은 경우에는 어른이 먼저 한 점 먹어야 가족들이 뒤이어 먹는 것으로 가르쳤다. 무엇을 하든지 어른이 우선이고 자녀들은 뒷 순위였다. 지하철을 타도 경로석이 따로 있고 심지어 임산부용 좌석도 따로 지정되어 있다.

부모의 생신도 챙기지만 60세에는 회갑이라는 연화가 있다.

효도의 개념은 먼저 부모가 준 몸인 자신을 잘 챙기는 것에서 시작한다.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다'라는 뜻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효도의 시작으로 여겼다.효경(孝經)에 실린 공자의 가르침이다.

몸 신

몸 체

머리털 발

살갗 부

받을 수

갈 지

아비 부

어미 모

 

공자가 집에 머물러 있을 때, 증자가 시중을 들고 있었다. 공자가 증자에게 "선왕께서 지극한 덕과 요령 있는 방법으로 천하의 백성들을 따르게 하고 화목하게 살도록 하여 위 아래가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셨는데, 네가 그것을 알고 있느냐?"라고 물었다. 증자는 공손한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불민한 제가 어찌 그것을 알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공자는 "무릇 효란 덕의 근본이요, 가르침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내 너에게 일러 줄테니 다시 앉거라.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몸을 세워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날림으로써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끝이다. 무릇 효는 부모를 섬기는 데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는 과정을 거쳐 몸을 세우는 데서 끝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이야기는 효경의 첫장인 개종명의(開宗明義)장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신체발부수지부모라고만 하여도 뒷 구절인 '불감훼상, 효지시야'와 연결되어,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소중히 여겨 함부로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바로 효도의 시작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그리고 부모가 돌아가시면 근대이전에는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살이는 부모가 사망했을 때, 자식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거주하면서 탈상할 때까지 묘소를 돌보는 일을 말한다. 시묘살이는 유학의 유행과 함께 널리 실행되었다. 유학은 효를 지상으로 하는 이념이므로, 유학자는 돌아가신 부모를 3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모셔야만 했다. 그 때문에, 시묘살이 중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는 경우가 많으며 심하면 생명을 잃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시묘살이는 유가의 보편적인 예서인 가례家禮등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시묘살이가 사대부가에 유행하게 된 것은 옛날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을 위해서 한 일이 중국에서 계승되었고, 이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사대부가의 풍속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시묘살이는 의례의 실천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유교적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시묘살이는 부모가 돌아가셨지만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생전에 못다 한 효도를 지속한다는 의미가 있다. 시묘살이는 국가의 법에는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식 의례행위라기보다는 사대부의 삶 속에 자리 잡은 전통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기록에는 고려시대 때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918~1910) 시묘살이가 시행되었다. 보통 2년에서 많게는 6년에 걸쳐 시묘 살이를 하였다. 이것은 개인과 가장 가까운 부모에 대한 지극한 예의였다. 시묘살이는 부모에 대한 효도를 실천하는 하나의 관습이었다. 그 외에 돌아가신 분을 위하여 제사를 올렸다. 제사는 유교적 방식에 따라 경건하고 거룩하게 모셨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십계명의 유일신 개념에 반대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제사는 추모기도로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제삿날만큼 한국 사람들이 직장을 빠지더라도 철저하게 지키는 행사는 없다. 죽어서도 같이 살아가고 지켜준다는 조상존중의 정신이 살아있다. 풍수도 매우 중시한다. 풍수도 과학적 근거가 있다. 돌아가신 분과 후손은 같은 DNA를 가지고 있어 서로 공명한다. 작고한 분이 습기가 많고 물이 흘러 유골이 홀대를 당하는 경우 자손에게 화가 미친다고 믿는다. 실제로 풍수에서 일이 잘 안 풀리는 집안의 산소를 파보면 유골이 지하수에 빠져있거나 습기를 머금어 유골이 예쁘게 산화되지 않고 검은 때가 끼거나 보기에 흉하다고 한다. 가계의 DNA는 죽거나 살거나 서로 공명하면서 영향을 끼친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자신의 몸 관리부터 조상의 제사에 이르기까지 삶의 방식의 하나인 예는 6000년 이전 단군시대에도 있었지만 조신시대 유교문화정치에서 극대화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는 공자를 핵심으로 한 유교적 문화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사서삼경에 나오는 효도를 기반으로 한 수신의 제반 규례를 철저히 지킨나라는 한국 뿐 이었다. 인간관계는 물론 인간의 일로 얽혀있지만 고도의 승화된 절제미가 있었다. 부부가 유별한데 한쪽이 죽으면 부녀자는 독신으로 정절을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하였다. 물론 이것은 근대 페미니즘 적 식으로보면 말도 안 되지만 불과 수 백년 전 까지 그런 관습을 유지했다. 2010년대에는 한국 여성들이 한국 남성을 집단적으로 내려 보는 패미니즘이 유행한 경향을 보였는데 그로 인하여 남성 측의 반발로 폭행도 있었다.

그런 영향은 한마디로 말하면 1980년대까지 유교적 관습에 억눌려있던 여성들이 1990년 이후 개방적 문화가 만연되면서 사회 각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나아가 남성위주의 사회에 도전장을 던지게 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동안 유교문화에 억눌린 여성의 실체가 풀린 것이다. 2020 현재 여성은 군대도 자원해서 가고 장교도 있으며 국회의원이나 장관직을 수행하는 고위직 여성들이 많아졌으며 국가고시도 여성의 합격률이 50% 이상이며 심지어 고등학생이 올림픽에 버금하는 세계대회에서 5관왕을 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지금은 여성상위 시대가 되었다. 가정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중국의 '동이열전(東夷列傳)''동방예의군자지국(東方禮義君子之國)'에서 유래한 말이다. 공자가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 우리나라가 예의에 있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으뜸인 것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예의 우수한 칭호을 가진 한국의 정체성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다. 다음 뉴스는 오마이뉴스 (2011.10.31. 임윤수 기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48289(2020.1.16.)기사이다. 이 기자는 김우현(2011) 주자학, 조선, 한국도서출판 한울. 의 내용을 들어 동방예의지국에 대해 비판한다.

 

류큐는 1372년부터 중국에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는데, 예의를 잘 지키는 나라라는 뜻으로 '수례지방'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중국 왕조들은 전통적으로 중화사상에 순응하는 국가들에 ''가 포함된 칭호를 내렸던 것이다. 이처럼 복종을 잘한다는 뜻으로 '하사'한 이름인 '동방예의지국'을 조선은 자랑스럽게 여겼다. 한국에서는 이 말이 나온 지 20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자랑스러운 뜻으로 여겨 자주 언급하고 있다(김우현(2011. 주자학, 조선, 한국도서출판 한울.).

 

"민족주의에는 국가와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고 발전시켜 외국과의 경쟁에 대비하여 미래지향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조선의 민족주의는 아무런 대비 없이 지내다가 굴욕과 침략을 받고서야 가해자와 침략자를 원망하는 저항 민주주의보다 더 수동적인 '왜 때려' 민족주의다(김우현 2011, 주자학, 조선, 한국도서출판 한울.).”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동방예의지국', 비록 경제적으로는 조금 뒤떨어지더라도 경제선진국과의 비교에서 사회적 가치의 우월감으로 떳떳하게 말하곤 하던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이 이토록 수치스런 역사의 잔재물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얼굴이 후끈거립니다.

 

부하 국가가 되어 아무런 자존 없이 아부를 떨듯이 받치는 조공의 대가로 받은 '동방예의지국'은 결국 양반들이 백성을 등쳐먹던 수탈의 역사, 10승지라는 미명으로 피난갈 곳을 미리 정해 놓을 정도로 무능한 나라, 양반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병역이 면제 되던 몰염치한 나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이런 '동방예의지국'이 작금의 정치에서는 그 대상이 중국에서 미국으로 바뀌고, 외교를 가장한 또 다른 형태의 조공으로 우방국이니 동맹이니 하는 표현으로 현대판 '동방예의지국'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가 걱정됩니다.

중국의 왕조가 바뀐 이유는 한국을 먹으려다가 먹지 못하고 자신들이 망한 에를 보여준다. 수나라, 당나라 등이 그랬고 명나라는 조선이 정벌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독하다. 한국은 땅이 작아 중국에 사대 외교를 하였지만 중국이 땅만 컸지 한국을 마음대로 하도록 두지 않았다.

중앙아시아의 민족과 한국과의 관계는 아주 모호하다. 한국인은 몽골인종을 바탕으로 그 조상들이 러시아 바이칼에서 중국대륙, 심지어 알라스카를 지나 미국 인디언에까지 미치는 범세계적인 분포를 보여준다. 현재의 한족이 중국을 형성하기 전에 중앙아시아를 지배했고 한족에게 한자문명을 배우도록 한자를 만들었다. 한국민족은 강한 자 앞에서는 더욱 강하고 약자에게는 절대로 폄하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세계4대 강국인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인에 이야기 할 때 미국놈, 중국놈, 소련놈, 일본놈 이라고 놈자를 붙여서 기를 꺾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절대로 약소국에 대해서는 놈자를 붙이지 않고 존중을 한다.

세상은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한 곳이고 인간은 신이 창조한 최고도로 정밀한 예술품이다. 신은 인간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살기를 원하지 폭력과 정벌과 살육을 하면서 설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관계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예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공자도 유교의 근본개념인 인에 대하여 다은과 같이 말한다. 인의 근본은 예다.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이 말을 보면 중국이 제후국에게 예를 하사한 것만은 아니다. 예를 바로 자신들도 지켜야 했던 죄고 덕목인 것이다. 예는 어질 인의 바탕에 깔린 유교의 근본적인 철학이자 개념이다. 그리고 중국은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제후에게 하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했을지 모르지만 한국은 그 근본개념을 생활 속에 비밀스럽게 실천하여 인간관계를 넓히고 친구를 많이 만들어가는 국가이다. 전 세계적으로 한국의 여권파워는 일본과 싱가포르(공동1)의 뒤를 이은 2이라고 한다. 이 순위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 비자가 필요하지 않은 나라의 수를 기준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한국은 비자 없이 방문이 가능한 국가의 수가 188개로 독일과 같이 공동 2위라고 한다. 이 원천은 물론 한국이 가진 예에 관한 문화의 덕택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여권을 가지고 있으면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가 70여개국가 밖에 안 된다. 188개 국가를 갈 수 있는 나라인 한국의 문화적 정신적 영역이 더 넓은 것 아닌가? 앞으로 통신혁명과 AI 혁명이 일어나는 시대에 땅 크기가 국력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창의적 아이디어, 공감하는 문화, 좋은 규범, 헌신, 기여, 사랑과 같은 이타적이고 복지를 나누어 공유하는 힘이 더 큰 나라가 더 큰 국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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