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숨쉬는 나라, 영국 [64] 스위스

사랑이 숨쉬는 나라, 영국 [64] 스위스

2024. 11. 1. 02:09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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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아름답고 깨끗한 스위스로 스위스로

 

당초 일정이 틀어져 스위스의 베른이나 쮜리히로 가는 길은 포기를 하였다. 대신 호반의 도시 루쩨른을 거쳐 오후에 인터라켄(융프라우를 오르기 위하여) 에 들어가기로 가족과 합의를 보고 달렸다. 나의 임무는 달리는 것이다. 이 길은 고속도로로 연결되지 않아 시골길을 달렸는데, 운전 중에 가족들의 탄성이 나왔다. 와 와, 흘깃 보니 정말 아름답고 잘 가꾼 그림 같은 농촌이었다영국을 이에 비하니 오히려 중후한 느낌을 준다. 스위스는 한마다로 깔끔, 상큼, 그 자체, 초록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호수, 너무 아름다워 차를 세워 물가로 가서 보아도 초록 빛인데, 호수바닥을 초록페인트를 칠해놓았나, 물감을 풀어 놓았나 너무너무 신기했다. 루쩨른은 호반의 도시다.

 

[루째른의 카펠부르케]

 

 

주차할 곳을 찾다가 보니 도로 옆에 주차공간이 있어 주차를 하고 동전을 기계에 넣으니 그때부터 차 주차허용 시간이 전광판에 나타나면서 시계처럼 11초씩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전광판이 0인데도 서 있는 차는 불법 주차가 되는 것이다. 정말 머리 잘 썼다고 느끼면서 무지 많은 한국 여학생 배낭 여행객을 접하면서 정보교환을 하며 시내를 둘러보았다. 사자상, 지붕이 있는 나무다리, 호반의 요트와 페리 들이 눈요기 거리이다. 그리고 여행 안내소의 사람들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면 영어는 잘 통했다. 3-4개 다른 언어를 쓰는 나라이니 영어소통은 잘되었다. 루쩨른은 인터라켄으로 가는 길에 있어 통과지 이므로 잠깐 들려 보고 인터라켄으로 오후 2시쯤 출발하였다. 가는 길에 시내에서 테이크 아웃으로 구입한 음식을 호반 옆의 휴게소에 풀어놓고 배불리 먹었다. 빵과 햄, 요구르트를 음료수로 점심을 해결하고 잘 닦인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가는데 여기도 산이 높아 굴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긴 굴은 아니었지만 수시로 나타나는 속도를 늦추게 하는 그런 굴이 많았다. 노르웨이나 스웨덴의 짙푸른 호수와 정말 대비되는 곳이었다. 매우 여성적인 나라다. 내가 공부한 영국 엑시터 대학에 스위스 친구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짐바브웨서 온 흑인인데 스위스로 입양되어 이민 와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대학 예술부문의 철학박사과정을 우리학교에 적을 두고 스위스와 영국을 통학하던 친구였다. 이런 일은 영국의 독특한 교육제도 하에서 가능한 일이다. 내가 대학에 처음 입학당시 콘스탄티누스라는 친구는 한술 더 뜨는 친구였는데, 사이프러스(키프로스)란 곳에서 초등학교교편을 잡던 친구였는데, 그곳은 그리스 밑에 있는 섬나라로 터키와 그리스 간 영유권으로 한때 전쟁의 포화에 싸인 나라이다. 그 친구는 차를 배에 싣고 유럽대륙을 가로질러 운전을 하고 와서 우리대학에서 철학박사 공부를 하러 다녔는데, 보통 대학의 박사과정은 한국처럼 강의식이 아닌 지도교수와 1:1의 관계에서 공부를 하는 연고로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같이 교수 학생비율이 1:1인 여건이 좋은 곳은 학부 생들도 매일 지도교수를 만나 토론을 벌이는 반면, 우리학교의 경우는 이 같은 여건이 안되어 1개월에 4번 정도 교수를 만나는 정도여서 매일 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되었다. 학교규정상 1주일에 한번 만나게 되어 있는데 실제 만나면 지도교수는 화두를 던져주고 거기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라고 하는데 그러면 중이 면벽 하듯 혼자 궁리하고 도서관에서 필요한 이론서적을 읽고 인터넷 서치를 하여 토의정보를 수집하고 토론하는 일이 반복되는데 지도교수의 주 임무는 학생으로 하여금 사유(reasoning)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다음에 표현하고 이론을 다듬는 기술을 가지게 유도한다. 그러므로 어떤 학부는 유능한 학생은 지도 교수를 능가하는 능력을 가지므로 교수와 학생 간 갈등도 있다고 한다. 학생은 지도교수가 연구내용을 인정한다고 하여 안심할 수는 없다. 스스로 사회 저변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작업을 거치는데 주된 방법이 좋은 저널(Journal)에 출판을 하여 인정을 받거나, 아니면 우수한 학회에 참석하여 발표하여 다른 동료학자들의 비평과 질문을 받아보는 것(peer review)이다. 이것은 다시 지도교수로 하여금 학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특히 나의 두 지도교수는 두 분 다 보직을 가지고 있어서 마음 고생을 좀 했는데, 1차 지도교수는 대학원장으로 엄청난 규모의 학교조직과 예산을 관리하는 연고로 바빠서 시간이 없었고 2차 지도교수는 학교의 교육연구소 소장과 교육대학 학장직을 가지고 있어서 더 시간이 없었다. 만나기 위해서는 늘 비서에게 시간을 문의하여 1주일 전에 예약을 하여 시간을 정하여 만나야 했다. 그래서 중요한 이야기는 매주 열리는 정기 교수세미나 장에 가서 선채로 필요한 의사전달을 하는 일이 허다했다. 하여튼 그 흑인 친구는 스위스 베른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며 주기적으로 영국 학교에 와서 음악교육에 대하여 논문을 써서 학위를 마쳤다인터라켄은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작은 도시였다.

 

[인터라켄 전경 스케치]

 

시내에 들어서자마자 인터라켄 역이 나오고 거기서 여행정보를 받은 다음 인터라켄 산정상으로 가는 전철을 예약하고 역 바로 뒤에 있는 개울가의 작은 캠프장을 찾아갔다. 시설은 낡고 고급스럽지는 않았지만 역에 가깝고 있을 건 다 있어서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있었다. 이 도시는 한국인과 일본인을 위한 도시 같았다. 역에서 중심가 쪽으로 가니 호텔과 쇼핑가가 나왔는데 일본 제품을 위시하여 세계의 명품들이 이 좍 깔려있었다. 특히 시계, 등 작은 제품으로. 돈이 많은 일본인들이 쇼핑에 열중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일본인, 역시 돈 쓰는 것 보면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의 물가가 높아 모든 유학생들이 돈에 힘들어 하는데 유독 일본 애들만큼은 여유가 있다. 내가 공부하는 곳에 2명의 일본인 교육학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들에게 영국의 물가와 사는데 어려움이 없는지 물어보니 영국에 오니 돈을 써 볼만 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물가는 영국보다 더 비싸다는 것이다. 모두 도쿄 출신인데, 특히 도쿄대학에서 영어교육학을 강의하다 온 이주미 칸자카(zumi Kanzaka)라는 여학생은 나만 보면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를 연발하며 인사를 하는데 나를 만날 때마다 나에게 한국말을 한두 마디씩 배워갔다. 그녀는 김치를 즐겨서 여기서도 재료를 사다가 늘 담아 먹는다고 한다. 그녀의 남편은 공학도인데 1년간 엑시터대학에서 교환교수를 하다가 국내로 귀국하고 그녀는 아직 1년 정도 더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한다. 아쉬웠던 것은 그녀에게 김치를 한번 담아주었으면 했는데 사는 게 바빠 그러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일본인을 다 악인으로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는 편견을 가졌었는데 직접 상대해 본 이주미는 늘 마음에 선량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영국에서 만난 일본인이다.

 

슈퍼에서 스테이크용 고기를 사서 요리를 해 먹으면서 영양을 보충하고 편안한 잠을 잤다. 아침에 일찍 조반을 하고 역으로 가서 인터라켄 산정상으로 가는 기차를 기다렸다. 물론 여행천하 책자에 있는 할인티켓을 이용하여 기차비를 할인받고 컵 라면 티켓까지 챙겨서 출발했다. 여행 중에는 커피 한잔 서비스로 주는 티켓 이라도 생기면 절약을 위해 잘 사용을 하여야 했다. 기차를 타니 가다가 산을 올라가는 전철로 갈아타야 했다. 그런데 갈아 탄 전철에선 3개 국어가 방송으로 안내되는데, 영어, 일본어, 한국어가 방송이 되었다. 유럽의 한복판에서 한국어 안내를 받다니, 하는 반가움도 있었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얼마나 많이 와서 돈을 뿌렸길래 이런 조치를 하였을까 하는 놀라움이 앞섰다. 오르는 길은 말 그대로 중간 중간 호텔과 레스토랑 등을 만들어 놓아 중간에 먹고 마시고 보며서 가도록 해 놓았는데, 나는 이런 좋은 산은 전철을 타고 가는 게 아니라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많은 여행객들이 스틱을 잡고간편한 복장으로 걸어서 산 정상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 걷는데 하루는 잡아야 할 것 같은 높고 먼 길을.

[융프라우 전경]

 

중간 중간 중턱에 자동차를 주차하도록 만든 공간이 보였다. 중턱 정도까지 자동차를 가지고 와서 걸어가는 것으로 보였다. 하여튼 중간쯤 올라가니 만년설이 쌓인 산이 보였다. 온통 하얀, 눈이 부신, 큰 절벽들, 사진에서 많이 본 터라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것도 그렇지만 하이디의 알프스의 소녀를 연상하게 하는 산의 목장도 알맞은 관광자원이 되어 있었다. 비탈진 산에서는 건초더미를 만드는 일꾼들의 낫질과 트랙터 구르는 소리가 들리고, 어린아이의 장난기가 깃들인 것 같은 동화 같은 마을을 지나 전철은 점점 험한 골짜기를 따라 아슬아슬하게 산허리를 파서 만든 철로를 따라 올라갔다. 차안에서 나누어 주는 커피 티켓도 물론 잊지 않고 챙겨서 갔다. 전차에서 내려서 인터라켄 산벙우리 정상으로 걸어가는 통로 길은 얼음 굴, 으스스한 굴을 지나면서 사진을 찍고 바깥경치를 보면서 통로를 따라 나가서 라운지에 도달히여 우선 컵 라면을 신청하여 뜨거운 국물을 호호 불어가며 먹었는데, 이거 맛이 일품이다. 여기서 우리 돈으로 7-8천원 가량하는 이 라면은 싼 것이 아니다. 다른 식단메뉴도 그 정도 가격인데. 간식을 먹고난 후 뜨거운 커피를 한잔하고 건물 밖으로 나와 눈밭에서 뒹굴었다. 우리나라 유럽 여행객의 대부분이 여기를 들러 산꼭대기에서 라면을 먹고 간다는 생각을 하니 우스웠다. 서양 애들도 매운 라면을 눈물을 흘려가며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정상은 눈 천지인데 한여름에 아이들과 눈밭에서 썰매를 타고 놀다가 내려왔다. 아름다운 유럽의 관광지는 우리나라 사람이 모두 다 와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우리나라 사람도 사람이 아름답고 여유롭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고 우리도 우리 환경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도록 말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인터라켄에서 내려와 저녁을 먹고 느지막히 샤워를 한 다음 짐을 꾸려 오후에 이탈리아로 가는 길로 일정을 잡았다. 지도를 보니 고속도로가 스위스 외곽을 휘어져서 가는데 이를 아주 짧게 질러가는 길이 보여 그 길을 들어섰는데 이게 큰 실수였다. 너무나 험한 산길을 들어선 것이다. 고산지대의 중턱을 올라가고 올라가서 다시 내려오고, 차가 허덕이기 시작했다. 길목마다 검문소가 있는데 길이 얼면 통과를 금지시키는 팻말도 보였다. 다행히 주위의 골짜기나 산은 전부 얼음과 눈으로 덮였으나 도로는 얼어있지 않았다. 이 길은 고속도로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았다 두 시간 정도면 빠져나올 스위스를 3-4시간이나 산골짜기에서 헤매고 있었으나 경치가 절경이라 그걸로 보상받았다. 겨우 고산지대를 빠져나와 스위스 어느 마을로 들어섰는데 그 고산지대 운전이 너무 무서워서 모두 얼어 있었다. 까마득한 절벽, 주위는 차가 한 대도 없고 차는 허덕 이면서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그 다음 그 좁은 길을 내려오고 또 내려오고, 브레이크 고장이라도 날까봐 조마조마했다. 하여튼 마을로 들어서서 그냥 어디 BNB라도 들어가서 쉬고 싶었다. 그런데 마침 시골 아주머니 한 분이 오더니 BNB이용을 안내한다. 가격을 보니 우리 돈으로 약 20만원가량 하는데, 그 돈이면 도시하나를 관광할 돈이라 주저하다가 의견을 모아보니 이태리로 가자는 편이 우세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다. 그 친절한 아주머니에게 고속도로를 물어 길을 점검하고 작별을 고한 다음 고속도로를 탔다. 조금 가다가 남은 스위스 프랑을 다 소비할 목적으로 휴게소에 들렀는데 상당히 괜찮았다. 적당히 식품도 사고 요기도 하고 더욱이 거기에 무료 인터넷 연결 컴퓨터가 있어서 이 메일을 첵크했더니 학교에서 연락이 와있었다. 나의 Ph.D.후보자 승격 구술시험이 통과되어 연구진행을 계속하라는 연락이었다. 지친 몸이지만 마음이 날아갈 듯 했다. 지친 몸에 학교공부의 앞은 불투명하고 이런저런 부담에 식구들한테 짜증을 내기 일쑤였는데 모든 피로가 일거에 풀리며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았다. 정말 기분좋았다.

이 여행으로부터 10년 후에는 회사일로 스위스 출장을 오게 되었는데 그때는 베른과 쮜리히를 방문하는 일정이었다. 베른은 정치도시였다.

 

[베른소재 정부청사와 의회]

 

국회, 행정부 및 정치사무소 등이 다 거기에 있었고 도시도 깔끔했다. 베른에서는 과학기술연구소들과 국제공동연구 양해각서 체결과 저녁식사 일정을 보내면서 스위스의 과학기술 요인들과 대화를 했는데 스위스는 한국의 연구기관들과 손을 잡고 같이 일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나타냈다.

 

[스위스측과 비지니스 회의]

 

한국의 혁신적인 과학기술분야 투자와 경제발전을 보고 스위스 주요기관들은 한국을 꼭 붙들고 가야한다는 결심을 한 의지가 느껴졌다. 베른방문 이후 쮜리히로 옮겨 쮜리히 공대 측과 반나절 세미나를 하였는데 주제는 알프스의 기상예측에 관한 모델을 발표하고 토론하였다. 쮜리히 공대는 아인슈타인이 활동하던 반경에 있는 대학인데 대학 내 소재한 레스토랑에서 파는 스테이크가 일품이었다. 대도시 고급 레스토랑의 스테이크와 별반 다름이 없이 일품이고 맛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공과대학(ETH Zurich 1896-1900)에서 공부했다. 1896년에 ETH Zurich에 입학하여 1900년까지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다. 그는 ETH Zurich에서 교수로 일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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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쮜리히 공대전경]

 

취리히 공과대학은 현재 아인슈타인을 기념하여 여러 방식으로 그의 유산을 기리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문서들이 대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그의 동상이 캠퍼스에 세워져 있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딴 카페가 있으며, 방문객들이 아인슈타인과 대화할 수 있는 아바타 프로그램도 있다.

[아인슈타인 박시]

 

쮜리히에서는 도시에 소재한 중요시설로서 쯔빙글리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거주한 수도원과 교회가 있고 그들의 업적을 둘러보는 여유도 가질 수 있었다. 쯔빙글리가 16세기에 쮜리히의 대성당(그로스윈스터 교회)에서 봉직하고 있었다. 장로교를 개척한 종교개혁가 칼빈은 주로 제네바에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쯔빙글리가 봉직하던 그로윈스터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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