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숨쉬는 나라, 영국 [54] 벨기에

사랑이 숨쉬는 나라, 영국 [54] 벨기에

2024. 10. 25. 13:08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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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벨기에

 

이윽고 시간이 다되어 차들이 이동하기 시작하고 우리차도 수신호를 받아 다른 차의 행렬에 끼어서 배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배안까지 노란 줄이 도로를 만들어 이어지고 차는 안내원의 지시대로 따라 들어가니 앞차 뒤에서 정차하고 거기서 차는 세워두고 객실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배는 1층이 차를 세워두는 넓은 주차장이고 2층과 3층이 객실인데, 이 배는 도버만 건너는 배이므로 캐빈은 없는 것 같았다. 2층과 3층은 버스나 기차처럼 의자가 줄지어 있었고 군데군데 넓은 자리에 식당, 펍, 그리고 화장실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3층의 뒤쪽에 난 좁은 출구로는 배의 갑판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사람들이 나가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갑판의 전경은 매우 장관이었는데 어마어마하게 굵은 배의 굴뚝과 쾌속으로 질주하는 배의 뒤에 뿌려지는 물보라와 배의 족적이 환상적이었다. 시원한 바다 바람과 흩뿌려지는 물보라는 받으며 1시간 이상 갑판에서 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경치를 구경했다. 잉글리시 채널이 지도상으로는 아주 짧게 보이나 실제 그 큰 배를 타고 옥상 갑판에서 보아도 유럽 대륙을 볼 수는 없었다. 수평선만 보였다. 나머지 한 시간은 객실로 돌아와 아침을 먹으려고 줄을 서있는 대열에 끼어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하여 아침을 해결하였다.

 

[페리선내의 식당과 펍]

 

도버를 건너는 시간은 벨기에의 오스땅뜨까지 2시간 반 정도 걸렸다. 이 도버를 옛적 영국 왕실을 주름잡던 프랑스 왕조의 밀사들이며 정객들이 작은 배를 이용하여 수시로 드나들고 혹은 정치적으로 도피를 하는 해로로 이용하고 하던 역사를 돌이켜 생각하니 그 당시에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바람을 이용하거나 노를 저어 밤에 배를 타고 도망을 치거나 방문하거나 하였을 터인데, 그런 오래된 배라면 하루거리는 족히 될 것이다. 갑판에서 본 도버해협은 바다 가운데로 나오자 비도 흩뿌리고 파도가 여간 거센 게 아니었다. 3-4미터가 넘는 파도가 출렁이는데 지금 탄 큰 배는 그리 영향을 받지 않지만 작은 목선은 정말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바이킹족은 저 북유럽에서 엄청나게 먼 바다거리를 통하여 영국해안을 제집 드나들 듯 노략질하러 다녔음을 생각하니 이 사람들의 용감함과 자연에 대한 도전력이 얼마만한지 상상이 갔다.

 

[바이킹족의 침략]

 

도버를 건너는 방안은 일반여행객에게 여러 가지 방안이 있다. 유로스타라는 초고속 기차, 고속버스, 배, 그리고 자동차, 비행기등 안이 있는데 버스비는 매우 저렴한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단점이 있고 그중 기차비가 가장 비싼 것 같았다. 도버해협을 뚫는데 많은 비용이 들어 유로스타 1개월 권을 샀다하더라도 대륙과 영국을 도버로 건너는 경우에는 별도의 요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차나 항공기 혹은 배를 이용하는 것은 비슷한 것 같았다. 물론 기차로도 승용차를 싣고 파리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 해안부터 파리까지 기름 값이 절약될 수 있지만 그 비용이 감안되어 좀 비싼 것 같다. 항공기보다는 기차 값이 비싼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요금상식과는 다른 것 같다. 벨기에의 해변이 보이기 시작하고 해변에는 몇 개의 고층 아파트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유럽을 다니다 보면 고층아파트만 보이면 그렇게 친근감이 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작은 집만 보다가 우리와 비슷한 주거 문화를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시설들은 매우 한정된 지역에 있고 거의 많지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도 유럽국가중에는 우리나라 주거문화를 본받아오는 나라도 있다. 여행말기에 폴튜갈의 리스본에 들러서 도시외곽으로 나가보니 우리나라의 80년대 아파트신축 및 모델하우스 전시같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앞에는 광고판, 입구에는 구경군을 위한 얇은 슬리퍼, 새로 신축한 아파트 주거단지주변에 들어선 금융기관, 쇼핑센터, 포장이 덜되어서 먼지가 풀풀 날리고 곳곳에 마구 밟혀서 말라붙은 개똥과 바쁜 사람들, 말 그대로 우리 나라 80년대의 아파트 모델하우스 전시장과 같았다 아마도 이 나라는 이것을 우리나라에서 배워간 것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렇게 흡사한지 볼수록 정이 갔다.

드디어 벨기어 오스땅트에 닿아 차들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하선은 식구들을 다 차에 싣고 앞차가 가는 대로 따라 나가면 그만이다. 나가다 보면 세관원이 육안검사를 하고 여권에 도장을 꾹 눌러준다. 여행객인지 다 안다는 눈치였다.

오스땅뜨 항구를 보니 포구에 요트가 가득하고 어선도 정박해 있는 것 같았다. 해안변 도로에는 한국의 횟집처럼 식당이 줄지어 있었고 수많은 노점상들이 기념품이나 생선 마른 것을 포장마차 같은 수레에 놓고 팔고 있었다. 영낙없이 한국의 자갈마당이나, 인천의 월미도 같았다. 그러나 식당가를 가만히 보면 회를 파는 곳은 없고 해물요리는 많은 데 주로 요리를 하여 파는 레스토랑이며 생선 말리는 것을 파는 노점상의 물건도 우리가 생각하는 마른 포가 아니라 가공하여 파는 생선종류였다. 따라서 우리가 좋아하는 회나 포 같은 것은 아니어서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도로의 사정과 운전을 익히기 위하여 시내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비교적 차가 덜 다니는 골목을 이용하여 신호등의 체계를 보고 도로의 차선과 주차를 어떻게 하는 지 등을 점검하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대륙에서 첫 운전 적응을 위하여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운전하던 습관을 떠올리며 운전자의 위치만 바뀐 차를 가지고 감을 잡아보니 5분 정도 지나니 곧 익숙하게 되었다. 오스땅뜨는 첫 기착지가 아니므로 빨리 이동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것은 오스땅뜨에는 별로 매력적인 것도 없었을 뿐더러 그것은 첫 기착지로 가서 숙소를 잡아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 첫 기착지를 어디로 하느냐를 두고서 집사람과 의논을 하니 의견이 세 가지였다. 수도 브뤼셀을 가는 것과, 부르게 라는 도시와, 아름다운 도시라고 불리는 안트워프를 방문하자는 의견이 대립되었다. 그런데 브뤼셀은 좀 남쪽에 있고 어차피 귀국길에 오스땅뜨를 오려면 지나와야 하므로 나중으로 미루고 나는 부르게는 별다른 여행 정보가 없어 안트워프를 고집하였다. 거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나의 박사과정 논문연구 중에 통계처리 과정이 있었는데 나는 우리 대학에 research fellow로 있는 닥터 뮤지스(Mujis)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었다. 원래 통계학 전문 교수로 닥터 피터 프리스란 원로교수가 있었는데 그는 너무 시간이 바빠 중요한 부분만 나와 토론을 하여 조언을 주고 나머지 상세한 부분은 닥터 뮤지스의 도움을 받으라고 그를 소개하여 준 연고로 나는 논문 연구내내 줄 곳 그의 도움을 받았었다. 그는 우리대학의 세계적인 교육경제학 연구가인 David Raynolds 의 연구팀의 한 사람으로 벨기에 인이었다. 데이비드 레이놀즈는 교육효과(education effectiveness) 분야에 대하여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학자로서 2000년 말에 뉴캐슬 대학에서 우리대학으로 옮겨온 학자인데, 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연구팀으로 닥터 뮤지즈를 동반하고 있었는데 그가 우리학교에 부임하면서 닥터 뮤지즈를 연구조교로 데리고 온 것이다. 주로 영국의 교육 풍토-즉 교수임용 관련하여 언급하고 싶은 말은 교수들은 필요에 따라 수시로 옮겨 다니면서 연구를 하는데 유명한 교수는 미국도 예외는 아니지만 정부나 기업 혹은 민간에서 연구프로젝트를 유치하여 여기서 수반되는 막대한 연구비를 활용하여 자기의 학문 영역을 확장하는데 어느 대학이든지 많은 재원을 유치하는 학자가 유능한 것이다. 이 유치된 자금은 대부분 학교의 연구비 예산에 편성되지만 일정 행정비용을 제외하고는 그 학자가 사용할 수 있는 재량이 있으므로 자금을 유치한 학자는 그 자금의 범위 내에서 조직을 관리하고 자기와 뜻이 맞는 연구자들을 채용하여 관리한다. 말하자면 닥터 뮤지즈는 research fellowship을 가지고 학교에서 근무를 하면서 봉급은 실질적으로 David Raynolds 에게서 받는 구조를 갖는 것이다. 이런 연고로 교직원의 정원은 당초 대학에서 정해진 룰을 따르지 않는다. 채용과 고용이 비교적 책임교수의 예산 사용권내에서 자유로우며 경직된 직원의 정원제도의 적용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교수가 자리를 옮기면 그 분야의 연구와 예산은 홀연히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때로는 전통을 만들기에 매우 불합리하나 우리나라 처럼 영구적인 교수가 많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되고 자유경쟁체제가 학문에도 일상화 되어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무튼 Dr. Mujis는 지금은 워릭 대학에서 양적 연구방법론을 강의하는 교수로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도 데이비드 레이놀즈의 연구팀에 소속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벨기에 인이었고 나의 논문이 마쳐질 즈음 워릭 대학에서 교수자리를 잡았지만 나의 연구가 마쳐질 때까지 내내 이 메일을 이용하여 나의 분석방법과 결과해석에 대하여 토론하고 이를 도와 준 사람이다. 그는 특히 다변량 회귀분석 (Multivariate regareesion) 에 정통하고 이를 쉽게 분석하고 해석하는 최신 소프트웨어 펙키지를 가지고 우리학교의 세미나에서도 발표를 하여 많은 양적 연구가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나에게 특히 도움을 많이 주었다. 그런데 그는 벨기에의 안트워프 출신이었다. 내가 방학 즈음 그가 뉴캐슬로 가서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는 말에 작별을 하면서 유럽을 간다고 하였더니 그는 자신이 벨기에의 안트워프 출신이라고 말하면서 아름다운 안트워프를 방문하면 좋을 것이라는 조언을 하였다. 아무튼 나는 그에게서 어려운 고급 통계학을 배우고, SPSS의 분석방법을 토론하느라 신세를 많이 진터에 그의 고향을 꼭 방문해보리라 한 것으로 벨기에에 와서 나의 주장은 불문곡직하고 안트워프를 가지는 것이었다.

 

[성혈교회 내부모습]

 

아무래도 초행이니 첫 기착지는 서두르지 않고 우선 숙소를 정하는 것을 첫 임무로 삼았다. 그런데 안트워프는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뚜렷한 명소는 찾을 수 가 없어서 우리는 먼저 부르게(Burge) 로 가기로 하였다. 부르게는 성당과 시청 건물, 그리고 몇 명 미술관 등이 유명하였고 벨기에에서는 명소로 꼽히는 도시였다. 부르게에서는 부르게 성당을 보았는데 렘브란트의 승천이라는 그림이 볼만했다. 부르게교회 옆에는 부속성당이 하나 있었는데 성혈교회(holy blood church)라고 부르며 예수의 성혈을 보관한 교회였다. 이 교회에 대한 나의 관심은 향후 20년 이상 지속되고 자료수집과 더불어 예수의 유물에 대한 논픽션 다큐멘터리 저술의 조사의 주제가 되었다.(이책은 "예수의 유물"이라는 제목으로 2018년경 신아사에서 출판되어 현재 시중에 판매중이다)

[출판물, 예수의 유물, 446쪽]  

 

그런데 유럽에 초행인 우리는 대부분 방문지를 도시로 삼았다. 우선 수도를 중심으로 보고, 지나면서 작은 유명한 도시와 명소를 보는 것으로 목적지를 삼았는데 차를 가지고 발 가는 대로 가므로 일단 주요도시로 차가 갈 수 있는 곳으로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대략적인 일정은 도버를 건너 벨기에에서 북유럽쪽으로 먼저 일주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북유럽은 비싼 도시라 나중에 오기도 어렵고 일단 북유럽을 일주하는 길에 인근국가를 거치면서 보고 북유럽을 거친 다음 독일을 거쳐 동구권을 보고 중부 유럽을 거쳐 이태리 까지 갔다가 스페인을 향하여 오는 길에 마주치는 나라들을 방문하고 스페인에서 폴튜갈로 원을 그리면서 다시 프랑스 인근을 거쳐 베네룩스 3국을 거쳐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즉 북유럽부터 큰 원을 그리면서 유럽을 한 바퀴 돌고 중부를 지그재그로 지나 스페인을 돌아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오스땅뜨에서 고속도로로 나가는 길을 찾기 위하여 시내를 이리저리 돌다가 마침내 길을 찾아 고속도로를 타게 되었다. 그런데 일단 고속도로를 타니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하였다. 어제 밤새도록 도버로 오는 수백마일을 달려온 터라 피곤한데다가 배에서 내려서 시내를 돌 때까지 긴장이 고속도로를 찾아서 죽 벋은 안전한 길로 들어서니 긴장이 일시에 풀리면 졸리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일단 고속도로를 탔다고 하여도 안심할 것은 아니었다. 이 길들이 지도에는 안 나오지만 수시로 이리저리 갈라지고 어떤 때는 고속도로가 끊어지고 라운드 어바웃 (round about) 이 나오고 도로 표지판은 영어가 아닌 괴상한 문자가 나오는 경우에는 다시 긴장을 해야 했다. 길을 한번 잊어버리면 한번 찾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예를 들어 덴마크 가는 길에 코펜하겐 이라는 이름이 안 나오고 계속 코펜하븐 (Copenhaven) 이라고 표시되어 다 와서야 이 표지가 코펜하겐 인줄 알았다. 폴튜갈의 리스본은 리스보아(Risboa)라고 표시되어 운전하고 가는 길이 제대로 가는지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대강 감을 잡는 기술이 늘어 아무리 어려운 문자표시도 알아 볼 수 있도록 단련이 되었다. 국경을 넘으면서 국가마다 문자의 형태도 다양하게 변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영어의 o 를 예로 들으면 o º õ ö ø 등등 같은 O 자 같은데 아래에 선을 그은 것, 사선을 그은 것, 위에 점을 하나 찍은 것, 두 개 찍은 것 등등이었다. 대체로 영문표기가 병행이 되어 있으나 알파벳 발음으로 유명도시가 발음이 대강 비슷하면 맞는 곳이었다. 벨기에는 좀 비싼 도시다. 특히 북유럽으로 향하는 길목의 도시들은 비싸다. 그것은 여행 정보지의 호텔이나 레스토랑 가격표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책자를 뒤지고 하여 부르게의 어느 곳에 켐핑장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곳을 찾을 방안이 묘연했다. 행인에게 물어보니 이 길로 곧장 가서 싸인이 나오면 따라가라고 하여 그리 했더니 쉽게 캠핑장을 찾을 수 있었다. 캠핑장은 주택가 외곽에 공원처럼 자리잡고 있었으며 비교적 괜찮은 시설을 가진 캠핑장이 보였다. 하루를 예약하고 여권을 맡기면서 돈을 지불하고 자리를 배정 받아 텐트를 쳤다. 그런데 차를 끌고 입구를 들어가면서 어느 노인네가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북쪽이냐 아니면 남쪽이냐 라고 물어 남쪽이라고 했더니 자신이 미국 군에 편입되어 한국전에 참전했다고 알려 주었다. 이따가 찾아보겠다고 말하고 우선 캠프를 차렸다. 캠프의 비용은 하루 이용하는데 주차까지 포함하여 약 1만 5 천원 정도 하였다. 이것은 4인 가족과 차를 포함하는 비용으로 매우 저렴한 비용이었다. 첫 캠프는 우리가 계획 한 대로 자리를 두툼하게 준비하여 침실을 만들고 식사를 만들었다. 결과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추울 것 같았는데 안은 비교적 더웠다. 저녁을 먹고 한국전 참전용사라는 사람을 찾아갔다. 지금은 그 사람 이름이 생각이 안 나는데 그는 캠핑카를 끌고 혼자 여행을 왔다고 한다. 어디 사느냐고 물었더니 지금은 밸기에에 사는데 전에는 미국에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보드카로 칵테일을 만들어서 거나하게 먹고 있었는데 어느 아름다운 미모의 아가씨와 같이 술 대작을 하고 있었다. 그 참전용사는 수염이 허연 나이든 노인인데 동반하고 있는 것 같은 아가씨는 금발의 20대 로 보였다. 너의 아내냐고 물었더니 너털 웃음을 웃으며 아니라고 하면서 젊은 사람끼리 이야기 하라고 그녀를 소개한다. 그녀는 자전거 여행객으로 아일랜드에서 자전거를 타고 배를 타고 영국을 지나 다시 도버를 건너 지금 벨기에를 여행 중인데 4-5개 나라를 여행한 다음 아일랜드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한다. 아일랜드에 살아서 그런지 그녀는 또렷한 영국식 영어발음이 매우 정확했고 나의 이야기에 대하여 이해가 빨랐다. 나는 그가 보드카 같이 독주를 좋아하는 것을 보고 같이 온 아들에게 ‘너 가서 선물용으로 가져온 팩 소주 한 개만 가지고 오렴’ 라고 부탁을 하여 선물용으로 보관해온 팩 소주를 그와 아일랜드의 아름다움에게도 권하였는데 그녀는 소주에다 약간의 오렌지를 섞어 마시면서 술을 잘 못 마신다고 수줍어 하였다. 그런데 그 참전 용사는 보드카보다 도수가 낮은 참 이슬을 잘 마셨다. 나는 한국전에 참전한 유엔용사들의 피로 인하여 우리는 후손들이 매우 살기 좋은 나라를 건설하였고 아직 휴전협정아래 군사적 대치는 지속되고 있지만 전쟁의 위험은 높지 않고 특히 남한은 국제적으로 매우 큰 발전을 이루고 있다고 하면서 그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그에게 무언가를 더 주고 싶었는데 특별히 가지고 있는 게 없어서 아쉽게 작별을 하고 우리 캠프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일랜드의 미모도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서 피곤하다고 하면서 숙소로 간다면서 돌아갔다. 이 자전거 여행에 대하여 또 하나 깨달은 게 있었다. 자전거 하나에 가벼운 텐트와 캠핑장비를 싣고 패달을 밟아 몇 개 국가를 여행하는 것 쯤은 유럽 여행족에게는 평범한 일이며 가장 여행지의 풍습과 문화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대부분의 도로가 자전거 길을 포용하고 어디를 가더라도 하루쯤 묵을 수 있는 캠프장 같은 여가시설이 있어 20대의 학생 미모가 혼자서 약간의 짐을 자전거에 매달고 대륙의 이 나라 저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다. 이런 여행객은 나중에 자세히 보니 버스를 이용하는 캠프족, 오토바이 여행족, 우리처럼 승용차에 때려 싣고 다니는 마이카 족, 캠핑카를 매달고 다니는 부류 등등 다양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가장 깨끗하고 부티가 나는 상급 여행자 신분이었다. 그런데 70-80년대에 유행을 이루던 일본인 단체 관광객은 이제 대도시나 유명관광지에서는 점차 보이지 않게 되고 그 자리를 한국인이 매꾼다는 인상을 받았다. 대신 일본인은 좀 더 깊숙한 곳, 즉 북유럽의 어느 한적한 시골이나, 영국의 깊은 빌리지 같은 곳에 가면 빈번히 보게 되는데 여행도 여행도 익어갈 수록 더 진미가 있고 어느 한 문화의 깊은 단면을 보는 것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물론 그런 여행은 훨씬 많은 돈을 수반하지만. 년 중 서너 번은 학교의 연구 수행 차 혹은 한국에서 오는 손님을 안내하고 마중하기 위하여 런던을 가는 길에 대영 박물관이나 버킹검 궁을 한번 가노라치면 여기가 신촌의 로터리인지 서울역 앞 건널목인지 구분이 안갈 정도로 한국 사람들의 목소리와 젊은이들의 삼삼오오 짝들, 장난 어린 목소리들 등이 귓전을 울린다. 많이 여행한다는 것은 바람직하나 이런 곳에서 에티켓을 잘 지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 나라의 이미지가 보이므로.

부르게의 성당과 그 안에 있는 렘브란트의 성화를 실물로 보고, 나오는 길에 예수의 성혈이 보관되어 있다는 작은 박물관에 들러 상당한 돈(미화 5달러 정도)을 치르고 예수의 피가 보관되어 있다는 유리관에든 작은 금 마개 유리봉을 보고(그 잔이 닫혀져 있으므로 성혈이 있는지 여부는 확인 곤란) 그곳을 만지면서 속으로 기도하면서 나왔다. 이 성당이 부르게에서 매우 유명한 곳 이었다. 렘브란트의 성화와 예수의 성혈이 그 가치를 더 높였다. 이 도시의 시청사는 독특하게 아름답게 꾸몄는데, 시청 건물 처마에 다른 나라 각국의 국기를 꽂아 두었는데 우리 나라 국기도 보였다. 이 부르게에서 본 성당을 필두로 우리는 유럽여행이 사실은 각국의 도시에 흩어져 있는 유명한 역사적인 성당을 보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깨닿게 된다. 사실은 성당은 안 갈래야 안갈 수 없는데, 중요한 문화재가 이 많이 소장되어있고 유럽인의 정신적 지주인 크리스트교의 본부이자 그들의 양심이 있는 곳이다. 그런 연고로 교회나 성당을 입장하는 데 돈을 내지 않는다. 다만 조금의 기부금을 내는데 그것도 자발적으로 낸다. 또한 중세부터 크리스크교가 퍼지면서 경쟁적으로 교회를 지으면서 최고의 건축술, 예술품(성화나 조각)등이 적용되었고 교회건물의 특징의 하나인 스테인드 글라스의 패턴과 문양은 교회를 감상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들어 이태리의 밀라노의 광장에 있는 도우모(교회)의 문에 그려진 문양은 관광객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많은 사람들은 이 문양을 한번 만지려고 그 먼 곳까지 순례하며 고생을 한다. 유명교회들은 지금도 예배를 위하여 사용되고 있으며 주말이나 주중에는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일반에 공개되었다. 부르게 시청사의 화려함과 그 옆의 교회를 보고 부르게 까지 들어온 포구를 뒤로하며 차를 몰아 안트워프를 도착하였는데 안트워프는 도시를 죽 살펴보기로 하였다. 말 그대로 숲이 많고 깔끔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런데 이 도시는 닥터 뮤지즈의 고향이라 특별히 들린 것인데 막상 우리가 시간을 보내기는 딱히 좋은 곳을 찾지 못하였다. 그냥 쉬러 온 사람에게는 마음을 탁 놓고 느긋하게 한적한 곳에 숙소를 잡아 게으름을 피우면서 포도주를 마시면서 마냥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도시였다. 우리는 안트워프는 차를 가지고 시내를 빙 돌면서 눈을 만족시키는 데 동의하였으며 나는 사실은 하루를 여기서 보내므로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음으로 한 번 둘러 본 다음 북쪽으로 가기로 하였다. 벨기에도 남과 북의 갈등이 있다고 한다. 상공업에 정통한 상공인계층 부자사람들과 농업을 주로 하는 남쪽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늘 갈등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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